▲동베를린 시대의 공화국 궁전 철거 반대 시위 현수막에 "왕은 언제 다시 온답니까?"라고 써 있다.
Mazbln. Wikimedia
2008년 공화국 궁전이 철거되었다. 동베를린이 지은 이 궁전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1700만 동독 시민들의 기억도 함께 먼지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30여 년을 버텨온 이 건물은 동독 시민들에게는 문화의 집이었고, 정치 참여의 공간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이 만든 사회의 상징이었다. 동독의 인민의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된 문화회관으로서 극장, 레스토랑, 볼링장, 사우나, 어린이 행사 공간 등이 있었다.
하지만 철거 현장을 바라보는 서독 출신 정치인들과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서베를린 시민의 눈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사라지는 사회주의의 흉물과 곧 부활할 진정한 통일독일의 영광을 함께 보았을 것이다. 6억 유로(9911억 원)를 들여 재건한 베를린 궁전은 18세기 프로이센의 웅장함을 21세기로 소환했다. 그러나 차마 궁전이라 부르지 못하고 '훔볼트 포럼'이라는 생경한 이름을 붙였다. 비판과 토론을 좋아하는 베를린 여론은 공화국 궁전의 철거와 프로이센 궁전의 복원을 두고 십여 년간 시끄러웠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기억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센 왕실의 기억은 "문화유산"이 되어 국가 예산으로 되살아났지만, 동독 시민들의 기억은 "극복해야 할 과거"가 되어 불도저에 밀려났다. 두 궁전 모두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나는 절대군주의 궁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독재정권의 궁전이었다. 하지만 통일 후 살아남은 것은 뜻밖에도 봉건적 위계질서의 상징이다. 이 무슨 모순일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부활한 제국주의 상징에 훔볼트라는 계몽주의 학자의 이름을 붙인 일이다. 빌헬름과 알렉산더 훔볼트 형제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으로 식민지 약탈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을 명명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신성모독이 아닐까? 이 거대한 궁전을 복원해 놓고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설왕설래했다. 박물관? 하지만 베를린엔 이미 박물관이 넘쳐난다. 결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민속박물관 전시품을 이곳에 모두 모았다. 그리고 '탈식민적 전시'를 표방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문화재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재들 상당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독일 식민지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과거 제국주의의 상징인 재건된 궁전에서 제국주의의 결과물을 "문화 교류"의 이름으로 전시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물음에 답하려는 듯 독일의 식민지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학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독일은 1~2차 세계대전 등 극복해야 할 산맥 같은 과거사가 있기 때문에 식민지 역사 연구에는 다소 소홀했다. 이제 그 일이 본격화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도 될까?
통일의 민낯

▲훔볼트 포럼 중정
고정희
통일기념일마다 정치인들은 "평화적 혁명"과 "민주적 통일"을 찬양한다. 하지만 베를린 궁전의 운명은 이 통일이 다분히 일방통행이었음을 말해 준다. 동독 시민들은 통일 과정에서 진정한 협상 파트너가 아니라 "흡수"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40년 역사는 "실패한 실험"으로 치부되었고, 그들의 경험과 성취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진실이었다 하더라도 구동독 시민들에게는 이념을 넘어 그들의 개인사며 삶이었다. 공산독재에서 벗어난 것은 백번 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40년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공화국 궁전 철거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도 구동독 시민들의 목소리는 주변적이었다. 반대 시위가 지속되자 어느 날 건물에서 석면이 나와 위험하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서도 부분 보존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결국 무시되었다. 결국 기술적 불가능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문제였다.
역사는 늘 권력자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기억되고 망각된다. 베를린 궁전의 재건 과정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로이센의 "문화적 업적"은 강조되는 반면, 그 군국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측면은 희석된다. 빌헬름 2세가 이 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선포했다는 사실, 이곳이 독일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외면되었다. 물론 동독 체제의 문제점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이 동독 시민들에게 가졌던 의미, 그곳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교류와 사회적 만남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
훔볼트 포럼은 "모든 사람을 위한" 문화 공간이라고 홍보된다. 하지만 이 공간의 건축 양식부터 전시 내용까지 모든 것이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바로크 양식의 웅장함은 위계적 질서를, 궁정 문화의 화려함은 엘리트주의를 체현한다. 반면 사라진 공화국 궁전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평등주의를 지향했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이었겠으나 동베를린 시민들은 이 궁전을 "모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독일은 두 궁전을 모두 보존할 기회가 있었다. 공화국 궁전의 일부를 남겨 독일 분단과 통일의 복잡한 역사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베를린 궁전의 역사적 가치도 인정하는 절충안이 가능했다. 그렇게 진정한 화해와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된 것은 죽기살기 게임이었다. 하나는 완전히 지우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복원하는. 이는 통일 독일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역사와 마주할 용기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불편한 진실들을 직시하기보다 편안한 과거로 도피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미래를 위한 질문
▲19세기 말 함부르크 상인들이 남태평양 섬에서 원주민을 몰살하고 갈취한 고깃배가 훔볼트 포럼에 전시되어 있다.
고정희
통일기념일이 되면 이런 질문들이 늘 다시 살아난다. 과연 무엇을 통일했는가? 영토와 제도는 통합되었지만, 기억과 경험도 통합되었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서독 체제를 동독 지역에 이식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시민들이 함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인가?
훔볼트 포럼에서 전시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문화재들을 보며 식민주의는 진정 극복되었는가? 박물관에 가둬놓고 "문화 교류"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베를린의 친구와 동료들이 있기에 다소 위안은 된다.
베를린 궁전 혹은 훔볼트 포럼의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기억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 불편한 과거도 함께 성찰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통일기념일은 단순히 과거의 성취를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진정한 통합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을 되돌아보는 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선택하고, 어떤 기억을 배제했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일 것이다.
슈프레강에 반사된 웅장한 훔볼트 포럼을 보면 한국의 '갈라진 남북의 하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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