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09 11:16최종 업데이트 25.10.1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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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조정훈

동대구역에 동상으로 서 있는 박정희는 소박한 차림으로 환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매우 잔혹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언론인을 사형시킨 사실이 단적인 사례다.

언론인이 정권의 걸림돌이 되면, 흔히 글을 못 쓰게 하거나 기고할 데가 없게 만들거나, 소속 언론사를 해체한다. 아니면 감옥에 가두거나 해외로 추방한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는 앞의 네 가지만으로도 언론인이 무력화됐다. 그런데 박정희는 일반적인 언론탄압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쿠데타 다음날, 박정희는 명목상의 지도자인 장도영을 내세워 포고령 제10호를 발포했다. 1961년 5월 18일 자 <동아일보>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은 17일 밤 포고문 10호로써, 16일 상오 9시 현재로 계엄지역 내에 있어서 혁명 수행상 필요할 때는 체포·구금 및 수색에 관하여 법원의 영장 없이 이를 집행한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언론인에게 누명 씌워 사형 선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자료사진

그 같은 '혁명 수행상의 필요'에 따라 5월 18일에 체포된 인물이 민족일보사 조용수 사장이다. 1930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가 민족일보사를 세운 것은 1961년 1월 25일이다. 31세인 그는 창간 4개월 만에 체포돼 혁명재판소의 재판을 받게 됐다.

군사정권은 조용수가 조총련계 자금으로 신문사를 만들어 북한의 평화통일론을 선전했다고 주장했다. 재일교포 이영근이 조소수를 통해 민족일보사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주장이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2006년 11월 28일 이 사건에 관해 진실규명결정을 내린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진실규명 결정 요지'에서 군사정권 검찰의 수사 실태를 이렇게 지적했다.

"공소장에서 이영근이 조소수를 통해 민족일보에 자금을 전달하였다고 적시하고 있었던 만큼, 조소수는 상당히 중요한 증인임에도 수사기관이 그를 석방하고 소환조사를 하지 않았고, 이영근에 대하여도 아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또 변호인이 창간 자금을 대었다는 민단계 재력가들의 명단을 제출하였음에도 당시 혁명재판소가 증인신문 등 자금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았다는 점, 당시 조용수는 민족일보의 자금은 거류민단 및 그 주변의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은 것이라고 신문지상에 해명하였다는 점, 치안국장이 '민족일보의 운영자금이 조련계에서 유입되었다는 데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답변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용수는 조총련이 아닌 민단계의 자금을 받았다고 진술했고, 그의 변호인은 자금 공여자의 명단을 제공했다. 치안국장조차도 조용수와 조총련의 연관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런 사실관계들을 확인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조용수와 북한의 연결고리로 지목한 이영근은 북한이 아닌 남한 정부의 칭송을 받는 삶을 살았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이 전개되던 때에 발행된 1990년 5월 26일 자 <조선일보>는 "정부는 2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난 14일 작고한 전 통일일보 회장 고 이영근씨에게 일본에서 통일일보를 창간, 재일동포의 단합과 권익 신장에 노력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고 보도했다. 노 정권은 이영근의 빈소에도 주일대사를 파견했다. 1961년 당시의 군사정권이 얼마나 엉터리로 수사했는지가 이런 데서도 증명된다.

조용수와 <민족일보>는 북한을 옹호하지 않았다. 진보적 인물은 으레 북한을 지지할 것이라는 관념은 반공정권과 극우세력의 오랜 편견이다. 사상이 진보적이면 우리보다는 저쪽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열등감을 노출시킬 뿐이다. 위의 진화위 결정 요지는 <민족일보>의 논조를 이렇게 정리한다.

"<민족일보>의 대(對)북한 인식은 <민족일보>의 사설에서 잘 드러나는 바, 북한체제나 그 지배자인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민족일보>가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은 혁신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체제나 김일성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었고, 하나의 한국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연방제통일방안과는 그 지향하는 방향이 달랐으며..."

조용수 재판이 엉터리였다는 점은 1957년에 고등고시 사법과를 통과하고 1961년 당시 26세였던 이회창의 회고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였던 그는 계엄군법회의와 혁명재판소에 파견돼 있었다. <이회창 회고록> 제1권의 내용이다.

"내가 소속된 재판부에 이른바 민족일보 사건이 배당된 적이 있었다. 피고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재일간첩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기소 내용에 대해 나는 기록상 자금 제공자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분명치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당시 혁명검찰부 부장이던 박창암 대령과 언쟁을 벌였다."

재판부 내에서도 이처럼 이견이 있었지만, 군사정권의 방침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진화위 결정 요지는 박 정권이 조용수를 처벌해야만 했던 이유를 이렇게 기술한다.

"당시 대외적으로 5·16 주도세력이 철저한 반공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고, 특히 군사정변의 제1호로 반공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으로부터 핵심 주체세력의 사상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자 대외적으로 반공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줄 획기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혁신계의 주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희생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항쟁의 여파로 박정희는 남로당 간부라는 사실이 발각돼 서울 남산의 헌병대 영창에 수감됐다. 이로 인한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고자 조용수를 빨갱이로 몰아세운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1961년 10월 31일 혁명재판소에서 조용수 사형이 확정되자, 박 정권은 사형선고에 대한 최고회의의장의 확인 절차를 거쳐 12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반인권적·반민주적 인권유린행위"

2008년 1월 16일 '민족일보 사건'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을 청구한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씨와 지인들이 선고 공판이 끝난 후 법정에서 나와 얘기하고 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민족일보 사건'으로 체포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 사장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조씨와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이 선고됐던 양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연합뉴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의 저자인 원희복 경향신문사 선임기자가 <내일을 여는 역사> 2016년 제64호에 기고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 따르면, 조용수는 10대 시절에는 우파 학생단체의 간부였다. 대구 대륜중학과 서울 연희대학을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조총련이 아닌 민단에서 활동했다.

그가 진보적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959년 무렵이다. 원희복 기고문은 이때 그가 조봉암 구명운동을 접하게 됐다고 알려준다. 이승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죽임 당하게 된 조봉암을 응원하면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알게 된 인물이 이영근이다. 위 기고문은 이영근이 반이승만·반김일성 및 반조총련 노선을 걸었다고 알려준다.

조용수가 귀국한 것은 1960년 4·19혁명 직후다. 그해 7·29총선에서 진보 정당인 사회대중당 공천을 받고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런 뒤 민족일보사를 창간했다가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조용수가 진보적 인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아무 증거도 없이 용공몰이를 했다. 원희복 기고문은 "국제 인권단체가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던 일이 실제 벌어진 것"이라며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큰 필화 사건이며 치욕적인 일"이라고 개탄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반인권적·반민주적 인권유린행위"로 규정하면서 "(국가가) 피해자 조용수 및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며, 피해자 조용수 및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라고 결정했다.

이 권고에 따라 재심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8년 1월 16일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라도 유죄를 주장할 법한 검찰이 손쉽게 백기를 든 것은 그렇게 강변할 만한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일보사 조용수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잔혹하게 언론을 탄압했는지를 보여준다. 설령 조총련 자금을 받았고 또 북한을 찬양했더라도, 사형 집행은 균형을 심각하게 상실한 만행이었다. 동대구역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매우 하찮게 여긴 독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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