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사
최근 접한 러닝 관련 도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러닝 열풍으로 한국판이 나온 지 16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입니다. 그는 소설가이자 러너로 이름난 인물입니다. 1983년부터 러닝을 시작해서 책을 쓸 2006년 당시에 이미 스물세 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일상에서도 매일같이 달렸고요.
이 책은 단순히 '러너 일기'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루키가 스스로 밝혔듯 러닝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에 가깝습니다. 러닝이 한 소설가의 삶과 어떻게 밀접하게 맞닿아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는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에 달리면서 배워왔다"라고 말합니다.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하고,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톤을 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루키에게 달리는 일은 소설 쓰기의 기초 연료인 셈입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128p)
하루키는 "레이스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러너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면서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합니다. 대신 그는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더 중요시합니다. 이는 자신의 일인 '소설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판매 부수, 문학상, 비평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나 못했나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면서요.
하루키의 말처럼 (프로 선수 레벨이 아닌) 마라톤이나 소설 쓰기는 타인과의 경쟁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1등'이 아니라 작든 크든 '내가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핵심이죠. 저는 러닝의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달리는 행위를 통해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 세계를 변화시키고 확장해 나가듯, 다른 수많은 러너들도 단련하고 성취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르든 느리든 내 페이스대로, 한계를 인정하되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믿으면서, 하루키의 말처럼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러닝의 '다양성'
최근 유튜브 댓글이나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면 '살기 위해 달리게 됐다'는 글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나빠진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달리다가 취미로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독 마음 아팠던 글은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 때문에, 또는 은둔형 외톨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러닝을 하게 됐다는 사연들이었습니다. "달리기 안 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다"라는 웹툰 작가 기안84의 말에 공감하는 이들도 보이더군요.
지난해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10대~40대까지는 자살이 사망 원인 1위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연령표준화 자살률 26.2명(OECD 평균 10.8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살 예방 전도사'로 불리는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지난 7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다양성의 결여에서 오는 문제가 크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자살률 감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저는 러닝의 핵심은 결국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사회적 압박이나 경쟁, 획일화된 질서에서 벗어나서 내가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달릴 수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1만 명의 러너가 있다면 1만 개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 건강'에 좋은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러닝 열풍이 개인의 건강을 나아지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를 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만드는데 이바지했으면 합니다. 1등이 되지 않아도 좋고,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도 없고, 달리는 폼이 조금 이상해도 문제없고, 목발을 짚고 질주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각자, 또 함께 달려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76세 하루키는 계속 달린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난 6월 5일 노르웨이릴레함메르에서 열린 노르웨이 문학 축제 기간 중 노르웨이 메테마리트 왕세자비와의 만남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그나저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키는 어느덧 76세가 됐습니다. 아직도 그가 달리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하루키가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진행하는 도쿄FM의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라마키 라디오> 홈페이지에선 방송되지 않은 사연(Q&A)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한 청취자가 최근(9/28) "무라카미씨는 지금도 달리기를 하고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루키는 "최근에는 고령자가 되어 느린 속도로 달리게 되었다. 40년간 매년 한 번씩 완주해 오던 풀코스 마라톤 연속 완주 기록도 2년 전에 끊겨 버렸다"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는 조깅이나 걷기를 하려고 한답니다.
76세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록 마라톤 풀 코스는 뛰기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묘비명에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쓴다고 했던 그의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동시에 '살기 위해' 달리고 있다는 수많은 러너들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달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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