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02 12:03최종 업데이트 25.10.0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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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2024년 10월 3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에서 열린 제21회 국제평화마라톤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달리고 있다. (해당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연합뉴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58p)

정훈님, 추석 연휴를 맞아 이번 편지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써보고자 합니다. 저의 새로운 취미인 러닝(Running, 달리기)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야흐로 '러닝 열풍'이라고 할 만큼 하천이나 공원마다 러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심지어 몰려다니면서 길을 막는 '러닝 크루'가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러닝은 유행하는 운동 중 하나입니다. 저도 초보 러너 대열에 합류한 지 몇 달 되었고, 5km와 10km 대회를 한 번씩 나갔습니다. 올가을에 10km, 하프 마라톤대회를 각각 신청해 놓았고요. 9월에는 총 175km를 달렸고, 앞으로 차차 달리는 거리를 늘려나갈 참입니다.

과체중 러너의 어려움

사실 이전에도 러닝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2021년에는 특별히 기록이나 거리를 재지 않고 그저 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장거리는 시도하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그때의 흐름이 '봉와직염'에 걸리면서 중단되고 맙니다. 지난해에도 러닝 앱 '런데이'에서 제공하는 '30분 달리기' 코스를 거치면서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또 오른발 부상을 당해서 결국 야외 러닝은 엄두를 못 냈네요.

올해는 주로 실내 러닝 머신에서 달리다가, 야외 러닝은 가끔 했습니다. 그러다가 별다른 계기 없이 '해볼까?'하는 마음이 들어서 여름부터 야외 러닝을 1주일에 다섯 번 이상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싸지 않은 러닝화를 하나 샀고, 점차 달리는 일은 이전보다 덜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어느 정도 달릴 수 있게 되니 오히려 '천천히' 달리게 됐습니다. 천천히 달려야 부상 위험 없이, 오랜 기간, 또 즐겁게 러닝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기록은 단축하고 싶었기 때문에 1주일에 1~2번은 빠르게 달려서 기록을 내거나, 최대한의 속도를 내보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기도 했습니다.

'키빼몸(키 빼기 몸무게)'이 100이 안 되는 과체중 러너인 저는, 아무래도 체중 때문에 기록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그럴 때마다 개그맨 강재준씨가 마라톤에 도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유튜브 채널인 '멧돼지러너'를 보면서 의지를 다지기도 합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갔던 그는 러닝을 통해 다이어트를 하고, 하프 마라톤 대회 완주에 이어 42.195km 풀코스 마라톤 대회까지 준비 중입니다. 강씨의 달리는 모습에 저도 힘을 얻습니다.

다른 풍경이 보인다

경주 보문호 산책로를 달렸다.박정훈

정훈님, 저는 사실 어떤 운동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요. 그나마 러닝에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은, 오늘 당장 얻게 되는 성취 때문입니다. 러닝은 오늘 달리고자 마음먹은 거리를 완주하면 그것 자체가 참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해냈다'는 기분이 쌓여갑니다. 마음만 먹으면 두 발로 저 멀리까지 뛰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괜히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스로를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몸을 갈고 닦는다는 느낌도 있는데, 그 기분도 나쁘지 않습니다. 언제나 숨이 차고, 힘이 듭니다. 최선을 다해 달릴 때는 꽤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힘을 쏟고 인내한 스스로가 대견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아직 초보라서 달리기의 효과도 금방 나타납니다. 어쨌든 이전보다 더 멀리 가고,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여행의 경험도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경북 경주의 보문호를 달렸습니다. 7km쯤 되는 코스였습니다. 단조롭지 않고 다리도 있고 언덕도 있고 다채로운 코스였습니다. 과거에 보문호를 두 번 왔지만 한 번도 여기를 달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호텔이 모여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가볼 생각도 못 했고요. 하지만 달리니까 금방이었습니다. 경남 통영에서도, 일본의 삿포로에서도 달렸습니다. 차를 타거나 걸을 때와는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여행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도 러닝의 매력입니다.

경쟁 대신 "내가 납득하는 그 어딘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사

최근 접한 러닝 관련 도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러닝 열풍으로 한국판이 나온 지 16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입니다. 그는 소설가이자 러너로 이름난 인물입니다. 1983년부터 러닝을 시작해서 책을 쓸 2006년 당시에 이미 스물세 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일상에서도 매일같이 달렸고요.

이 책은 단순히 '러너 일기'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루키가 스스로 밝혔듯 러닝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에 가깝습니다. 러닝이 한 소설가의 삶과 어떻게 밀접하게 맞닿아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는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에 달리면서 배워왔다"라고 말합니다.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하고,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톤을 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루키에게 달리는 일은 소설 쓰기의 기초 연료인 셈입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128p)

하루키는 "레이스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러너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면서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합니다. 대신 그는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더 중요시합니다. 이는 자신의 일인 '소설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판매 부수, 문학상, 비평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나 못했나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면서요.

하루키의 말처럼 (프로 선수 레벨이 아닌) 마라톤이나 소설 쓰기는 타인과의 경쟁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1등'이 아니라 작든 크든 '내가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핵심이죠. 저는 러닝의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달리는 행위를 통해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 세계를 변화시키고 확장해 나가듯, 다른 수많은 러너들도 단련하고 성취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르든 느리든 내 페이스대로, 한계를 인정하되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믿으면서, 하루키의 말처럼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러닝의 '다양성'

최근 유튜브 댓글이나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면 '살기 위해 달리게 됐다'는 글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나빠진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달리다가 취미로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독 마음 아팠던 글은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 때문에, 또는 은둔형 외톨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러닝을 하게 됐다는 사연들이었습니다. "달리기 안 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다"라는 웹툰 작가 기안84의 말에 공감하는 이들도 보이더군요.

지난해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10대~40대까지는 자살이 사망 원인 1위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연령표준화 자살률 26.2명(OECD 평균 10.8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살 예방 전도사'로 불리는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지난 7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다양성의 결여에서 오는 문제가 크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자살률 감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저는 러닝의 핵심은 결국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사회적 압박이나 경쟁, 획일화된 질서에서 벗어나서 내가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달릴 수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1만 명의 러너가 있다면 1만 개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 건강'에 좋은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러닝 열풍이 개인의 건강을 나아지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를 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만드는데 이바지했으면 합니다. 1등이 되지 않아도 좋고,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도 없고, 달리는 폼이 조금 이상해도 문제없고, 목발을 짚고 질주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각자, 또 함께 달려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76세 하루키는 계속 달린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난 6월 5일 노르웨이릴레함메르에서 열린 노르웨이 문학 축제 기간 중 노르웨이 메테마리트 왕세자비와의 만남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AP/연합뉴스

그나저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키는 어느덧 76세가 됐습니다. 아직도 그가 달리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하루키가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진행하는 도쿄FM의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라마키 라디오> 홈페이지에선 방송되지 않은 사연(Q&A)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한 청취자가 최근(9/28) "무라카미씨는 지금도 달리기를 하고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루키는 "최근에는 고령자가 되어 느린 속도로 달리게 되었다. 40년간 매년 한 번씩 완주해 오던 풀코스 마라톤 연속 완주 기록도 2년 전에 끊겨 버렸다"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는 조깅이나 걷기를 하려고 한답니다.

76세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록 마라톤 풀 코스는 뛰기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묘비명에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쓴다고 했던 그의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동시에 '살기 위해' 달리고 있다는 수많은 러너들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달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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