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0.01 09:46최종 업데이트 25.10.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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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데 특출나다. '아프면 쉬기'를 권고하는 국가와 노동자를 절대 쉴 수 없게 만드는 기업 사이 공모에서, 저출생 장려 캠페인과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 속에서. 국가와 사회에 '위기'란 포용과 배제의 경계선을 가르는 첨예한 모험이다.

돌봄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상 가족 신화와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돌봄 정책 속에서, 그 경계선은 '집'을 향한다. 돌봄은 항상 '집이야말로 안전한 공간'이라는 전제 위에서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전제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현실에서 집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공간이고, 안전한 누군가의 계급적 특권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학대 속에서 가정을 떠난 청소년, 그리고 안전한 가정 속에서 성인기까지 보호받는 청소년의 삶을 대비해 보면 더욱 명료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 모순 역시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집이 안전하다'는 전제는 그만큼 국가와 사회에 있어 포기하기 어려운 전제다.

그러나 사회가 저마다의 이유로 불안정한 때, 더 이상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 가정이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비로소 집이 안전하다는 전제가 흔들리는 순간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가족 살해 후 자살'이 대표적이다.

어떠한 '감염'의 이유

2024년 8월 20일 대구의 한 병원 호흡기센터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이 안전이 꼭 가족 구성원 사이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친밀한 관계가 야기하는 권력구도는 여기서도 작동한다. 코로나19 범유행 시기에 우리는 또 다른 반증을 확인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거나, 원가족에게 제도적으로 분리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경우 등이 가시화됐다. 자가격리나 재택근무와 같은 조치의 경우 어떤 이들에 한해 감염으로부터 보호는 물론, 폭력을 저지를 시간까지 덤으로 보장했다.

가구별로 지급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역시 이 폭력의 구도 안에서 차별을 생성했다. 원가족과 관계를 단절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제도적으로는 여전히 원가족의 가구원으로 있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지난 글 '역학조사의 민낯... 식당 사장 패가망신의 이면'(https://omn.kr/2erwh)에서 밥 짓기와 같은 필수노동이 어떻게 감염을 매개할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했다. 많이 대체되었다지만, 밥 짓는 노동은 여전히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더욱이 집 안에서는 밥 짓기뿐 아니라, 식사 시간을 챙기고, 먹이기와 같은 세밀한 돌봄 노동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진다. 챙기고, 돌보고, 감독하고, 관리하는 일은 동거인의 옷 입기, 씻기, 외부 일정, 건강 챙기기 등 생활 전반을 아우른다. 돌봄이 필요한 동거인과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일은 감염을 쌍방으로 매개한다.

아무리 밖에서 수칙을 잘 지키더라도 같이 사는 사람이 감염되니 그때부터는 속수무책이더라는, 집을 돌보는 여성들의 코로나19 감염 '후기'는 과장 하나 없는 사실이다. 실제 신고 자료를 살펴보면 가족이나 동거인으로부터 감염될 가능성은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높았고, 이 성차는 유독 자녀나 부모를 돌보는 연령대에서 바이러스 변이나 제도적 변화와 관계없이 꾸준했다.

집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말

2024년 인구 10만 명당 성별 밸일해 발생률과 성비해당 연령대에서 성비가 1보다 크면 여성보다 남성이, 작으면 남성보다 여성의 발생률이 더 높다는 의미다.Health Socialist Club

지난해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백일해는 이 구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백일해(百日咳)는 백일(百日) 동안 기침(기침 해 咳)을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답게, 증상이 장기간 지속되며 전염력이 매우 강하다.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에서 감염되는 이 질병의 확산 양상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양상이 발견된다. 아동청소년 확진자 중에선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았지만, 자녀 돌봄의 주된 책임을 지는 30~40대 연령층에서는 여성 확진자가 남성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연령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 인구집단에서 백일해 발생을 살펴보면 남성에서 그 발생률이 더 높다. 하지만 연령을 구분하면 연령대별로 성별 차이가 뚜렷하다. 10대의 경우 여성 발생 대비 남성 발생의 비율이 1.56으로 남자 집단에서 발생이 더 많지만, 0~9세와 70대 이상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거의 동등하게 감염됐다.

반면, 20대부터 60대까지는 오히려 여성에서 발생률이 더욱 높고, 특히 그 차이는 30대와 40대에서 뚜렷하다. 돌보는 사람이 어떻게 감염되는지, 짐작하게 하는 자료다. 결국 자가격리, 재택근무, 휴직 등 보호와 안전을 빌미로 집 안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낸 의도적인 결과다.

안전한 집은 환한 미소로 나를 맞는 아내 또는 엄마로 끊임없이 형상화된다. '집 밖'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들도 여성의 모습을 가졌다. 상황이 변해 다시 노동시장으로 '복귀'하더라도 가족과 집을 돌보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쏟을 수 있는 파트타임을 선택해야 했던 이들 역시 여성의 모습을 했다. 이 형상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놓치고 마는 걸까?

집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말은 집을 안전한 공간으로 가꾸고 돌보는 누군가를 가정할 때만 일말의 진실이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시하면서도, 이 안전을 돌보는 사람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집 안에서도 감염과 전파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이루어지는 전파의 특성상 같은 공간이라도 집에 더 오래 있는 사람, 다른 구성원과 더 빈번히 접촉하는 사람, 밥을 주고 빨래를 하고, 아픈 가족을 간호 간병하는 사람일수록 감염으로부터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 관계의 중심에는 가부장적 위계와 권력에 따라 부당하게 배분되는 돌봄이 있다. 안전한 집은 결국 돌봄을 공동의 몫으로 갖는 평등한 관계의 토대에서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SC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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