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26 07:06최종 업데이트 25.09.26 07:06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당대의 지성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참석자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연합뉴스

2025년, 대한민국은 내란 사태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변을 겪은 뒤, 여전히 깊은 정치·사회적 분열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 갈등은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주권 질서와 헌정 제도 전반에 드러난 구조적 균열이 만들어낸 고착화된 위기다. '국민주권 정부'를 자임한 이재명 정부에게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이며, 막을 올린 개헌 논의와 그 후속 절차는 이 현실과 단호히 결별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핵심 질문은 두 가지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갈등이 유독 빈번하고 또 깊어졌는가? 왜 우리는 그 갈등을 흡수하고 완화하는 제도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가? 우리 사회 갈등의 구조적 원인과 이를 조정할 제도적 역량을 함께 진단하고, 그 해법을 헌법과 제도에 담아내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불평등과 낮은 제도 신뢰

한국사회 갈등의 특징부터 살펴보자.

첫째, 한국 사회 갈등의 뿌리에 있는 불평등 문제다. 노인빈곤율은 65세 이상 인구의 38.2%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며, 남녀 임금격차는 29.3%로 OECD 평균 11.5%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이러한 수치들은 세대·젠더·계층을 가로질러 갈등을 부추기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해, 결과적으로 갈등의 누적 비용 상승으로 이어진다.

둘째, 취약한 사회자본으로 타협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2023년 레가텀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 영국의 레가텀연구소가 매년 167개국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국가 번영 평가 지수로, 단순 경제 지표뿐 아니라 삶의 만족도, 사회적 신뢰, 시민참여 등 포괄적 요소를 종합해 국가별 '번영'을 평가)에서 한국의 사회자본 지수는 107위로, 아·태 주요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이는 사회적 신뢰, 네트워크, 시민 참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갈등이 온건한 방식으로 조정되기보다 집단 간 직접 충돌로 확산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셋째, 제도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 보니 제도 밖에서의 집단적 동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중앙정부 신뢰율은 37%로, 대인 신뢰도(53%)에 한참 못 미치고 OECD 평균(39%)보다도 낮다. 제도 보다 가까운 관계망, 즉 동질 집단에 의존하고 이들의 힘을 동원하는 사회일수록 대립과 충돌도 빈번해진다. 갈등이 제도 바깥에서, 즉 거리와 광장에서 증폭될 위험이 커진다.

넷째, 언론에 대한 불신이 사회적 합의의 비용을 높인다. 2022년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가짜뉴스 문제가 매우 심각하며 시민들이 생각하는 언론 보도의 공정성은 5점 만점에 3.07점에 머물렀다. 2024년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 조사에서도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31%로 47개국 중 최하위권인 38위로 집계됐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실 공동체'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유튜브 등 디지털플랫폼이 그 빈틈을 파고들어 확증편향의 재생산 구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극심한 갈등 병목 현상

한국 사회 갈등의 뿌리에는 불평등과 낮은 제도 신뢰, 취약한 사회적 자본 등이 있다.셔터스톡

어느 사회에나 갈등은 존재한다. 다만 갈등을 제도 안으로 유인하고 흡수해 '재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상생과 협력의 자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제도적 상황은 이 재처리 과정이 여러 경로로 인해 가로막혀 병목 현상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갈등의 병목이 발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표성 왜곡으로 인해 주권자의 의사가 제도 정치권에 신속하게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득표와 의석 간 괴리를 보여주는 지표로 갤러거 지수와 루스모어-한비 지수가 있는데, 2024년 총선에서 이 지표는 각각 27.24, 31.64로 매우 높았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대표성은 왜곡된다. 즉, 청년, 여성, 소수정당 지지층과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가 정치 구조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갈등은 조기에 포착·조정되지 못해 결국 사후에 폭발하게 되는 구조인 셈이다.

둘째, 참여의 비대칭으로 인해 갈등의 병목이 발생하고 있다. 2024년 총선 투표율은 67%에 이르고, UN 전자 참여지수(UN E-Participation Index, 각국 정부가 전자정부 웹사이트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국민들이 공공정책의 형성과정에 얼마나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평가하는 지표)도 세계 4위 수준에 이를 정도로 정치 참여 의지는 높다. 그러나 실제 입법 과정에서는 이해관계자 참여가 배제되고 있으며 입법영향평가도 빠져있다. 한국리서치의 올해 조사에 따르면 지방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시민참여 경험은 10~20% 미만에 머무르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이 정책에 충분히 반영된다고 느끼는 비율도 매우 낮다.

셋째,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역량에도 불구하고, 우리 행정은 종종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실패하고 있다. OECD 디지털 정부 지수(OECD가 회원국의 행정 분야 디지털화 수준을 평가하는 공식 지표로, 온라인 행정서비스, 데이터 활용, 정부 개방성, 국민 중심 행정 등 6개 부문을 종합적으로 평가)에서 2019년에 이어 2023년 2회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온라인 여론 형성 과정에서는 확증편향과 반향실(에코체임버) 효과가 심화되고 있으며 가짜뉴스와 왜곡된 정보가 만연하다. 문제는 이를 극복할 사회적·제도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넷째, 숙의의 품질이 균등하게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숙의를 위해 타운홀 미팅이나 시민 공론화 제도가 시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단발성 행사에 그쳐, 정책 과정의 표준 절차로 정착되지 못했다. 그마저도 시민들 사이의 충분한 숙의 없이 주최 측의 기획과 의도가 앞서는 경우가 많으며, 대통령이 주재하는 타운홀 미팅조차 그 예외가 아니다.

갈등의 제도화 방안

결과적으로 제도라는 이름의 배수로가 너무 얕고 좁아,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갈등을 감당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에 대한 해법은 명확하다. 갈등관리의 핵심은 사회에서 갈등이 생기는 속도, 빈도, 양(갈등 발생 압력)을 제도를 통해 조정·해결할 수 있는 역량(제도적 유인 및 흡수 역량)에 달려있다. 이를 복원비(resilience ratio)로 표현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흡수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첫째, 대표성 개선이 급선무다. 소선거구제 폐지, 비례대표 확대, 결선투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은 국민 대표성, 사회적 포용, 정치적 안정성을 높이는 핵심 방안이다.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인 지난 6월 3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중학교 1층 체육관에 마련된 월영동 제4·5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연합뉴스

둘째, 정책의 개방성과 포괄성을 강화해야 한다. 국제 환경협약인 오르후스 원칙(오르후스 협약은 1998년 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에서 제정된 국제 환경협약으로, 정보를 쉽게 받을 권리, 정책결정 과정의 시민참여권, 사법적 구제 접근권의 원칙을 담고 있다)을 국내 정책의 표준으로 도입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단계'에서부터 시민 참여를 의무화해야 한다. 모든 법률안에는 사전 영향 평가, 이해관계자 식별 지도, 대안 비교표 등을 기본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숙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숙의는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광장의 에너지를 공적 의사결정 공간으로 끌어오는 마중물이다. 의제설정–입법–정책형성-집행–평가와 같은 전 주기에 걸쳐 이해관계자 협상과 공론화를 포함시켜, 대표성·투명성·근거 기반성 같은 절차적 정당성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정보의 무결성(정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더라도 정확하고, 완전하며, 일관되게 유지되는 특성)과 설명책임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모든 행정 절차에서는 객관적 정보자료와 함께 불확실성의 범위, 소수 의견 요약을 표준 서식으로 반드시 공개하고, 근거 데이터와 참고문헌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발언은 토론 규칙과 근거 표기를 의무화하며,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여 공개해야 한다.

다섯째, 현장 대응과 피드백 루프를 상시화해야 한다. 참여, 숙의, 결정, 집행, 환류 등 전 과정을 대시보드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관리하며, 합의사항 이행률, 재설명 빈도, 분쟁 지연 일수, 수용성 변화, 비용 절감 효과 등을 지속적으로 측정해 공개해야 한다. 이해당사자와 함께 결과를 점검하는 공개 청문과 사후평가 면담을 정례화해 신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파이프라인을 국가의 헌법적 책무 규정에서 출발해, 갈등관리기본법 제정, 국가공론위원회와 국가공공갈등조정원 등 전담 기구의 설립, 표준화된 절차(갈등영향평가, 매뉴얼, 정부 간 분쟁조정 프로세스, 전문가·퍼실리테이터 양성 및 인증 등), 그리고 갈등 데이터베이스와 조기경보시스템 구축·운영에 이르기까지 법제화한다면, 갈등이 체계 밖으로 이탈하기 전에 조절할 수 있다. 또한 유명무실했던 정부 간 분쟁조정위원회의 실효성을 높이고, 국가인권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 등 옴부즈맨 기관의 기능까지 강화한다면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참여는 쉽게, 숙의는 깊게

지금의 한국 사회는 높은 갈등 수준을 제도 내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제도적 병목의 해소인데,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갈등도 제도 안으로 돌릴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은 줄고, 정책의 정당성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절차의 품질이 곧 민주주의의 품질을 결정한다. 절차가 바뀌면 결과도 달라진다. 참여는 쉽게, 숙의는 깊고 치밀하게, 결정은 근거에 기반해, 집행은 투명하게, 평가는 상시로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의 문턱을 낮추고 통로를 넓히면 갈등은 비용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자산이 된다. 갈등은 '관리의 대상'이자,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경로이며,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다. 국민주권 시대, 참여와 숙의의 일상화야말로 민주주의의 관건이다.

은재호 정치·행정학자본인 제공

필자 소개 : 은재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Paris Saclay)에서 프랑스 정책변동 연구로 정치학(정책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지원국장과 정부 주요 부처 갈등관리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Sida et action publique>(200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2024)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