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평화수역 관찰'남북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고 시범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한 가운데 2018년 9월 20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망향전망대에서 한 시민이 NLL과 북녘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는 출범 후 줄곧 9·19 군사합의를 둘러싼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다, 2023년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계기로 결국 합의 ' 효력 정지'를 선언했다. 북한이 합의를 위반했으니 더 이상 우리만 지킬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애당초 북한의 위성 발사는 9·19 합의의 직접 대상인 한반도 내 군사행동과는 거리가 있는 사안이다. 굳이 연결 짓자면 정찰위성으로 들여다보는 것도 적대행위라는 주장인데, 그렇게 따지면 군사합의 위반의 잣대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셈이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의 위성 발사를 빌미 삼아 합의 파기의 명분을 만든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도발을 유인하려는 속셈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9·19 합의가 유지되는 한 우리 측 군사행동에도 제약이 따르는데, 이를 없애버림으로써 강경 대응의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군사분계선 일대 무인기 투입이나 대북 심리전 재개 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다. 평양에 무인기를 투입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남북 군사합의 파기는 결과적으로 서로를 향한 무장감시를 재개시킨 것에 불과하다. 9·19 합의가 유효할 때에는 북한이 방사포를 사격하거나 군용기를 MDL 가까이 접근시키면 우리가 "합의 위반"이라고 대내외에 규탄할 수 있었다. 윤석열 정부도 그간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에 9·19 합의를 근거로 국제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러나 그 명분을 스스로 내려놓아 버렸던 것이다.
군사분계선 인근 정찰의 경우, 그동안은 미국 정찰위성의 도움을 받아 합의 위반 없이도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굳이 합의를 깬 뒤 우리 무인기를 띄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합의를 깬 바람에 이제는 북한 또한 마음껏 군사분계선 일대를 정찰하게 되었고, 오히려 우리의 안보 불확실성만 높아졌다. 9·19 합의 파기는 실익 없는 자충수이다. 그런데도 9.19 군사합의를 파기한 것은 계엄을 위한 명분 축적으로 전쟁까지 감수하겠다는 무모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9·19 합의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합의를 정상화하는 것은 단순한 정책 번복을 넘어, 전쟁유발을 위한 잘못된 대결정책이라는 불온한 흐름을 완전히 청산하는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평화를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9·19 군사합의는 한국전 정전협정을 현대적으로 보완한 최고의 신뢰구축 장치이며 이를 지키는 것이 곧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평화, 평창에서 LA로!'
9·19 합의 정신의 복원과 함께, 앞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창의적인 구상도 필요하다. 현재 남북관계는 최악의 냉각 상태에 있고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기간에 극적인 개선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상대가 대화에 나오지 않으니 우리도 손 놓고 있겠다는 식으로는 영원히 진전이 없다. 다행히도 평화를 위한 의지를 보이는 목소리가 국내외에서 다시 나오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피스메이커(Peacemaker)를 자임하며 임기 중단됐던 북미 대화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 역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페이스메이커(Pacemaker)를 자처하며 트럼프 구상의 성공을 돕겠다고 화답한 바 있다. 비록 한국인들을 폭압적으로 억류시킨 조지아 사태로 한미관계에 불신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지만 전쟁을 막고 평화를 항구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한미 정상들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 위해서는 정부 간 공식 협상 재개 노력과 더불어 민간과 국제사회가 함께하는 평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
현재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코리아연구원(KNSI)에서 기획하고 추진 중인 평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평화, 평창에서 LA로!'라는 슬로건으로 제시되는 연속 기획이다. 향후 3~4년에 걸쳐 여러 단계의 교류·협력 이벤트를 거치며 2028년 미국 LA 하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승화시키자는 청사진이다. 정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 국제사회까지 폭넓게 참여하는 민관 협력이 전제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내년 2월에 평창평화포럼을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 한미 두 정상이 지난 8월 정상회담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소환한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산을 잇는 이 국제 포럼을 통해 한반도 평화와 신뢰구축에 대한 국제적 지지여론을 재조성하자는 것이다. 2019년부터 매년 열리다 중단된 평창평화포럼을 부활시키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두고 머리를 맞대는 공론장이 될 것이다. 이어 내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계기에 남과 북이 특별한 협력을 도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세계유산인 고구려 고분군과 개성 역사유적지구, 금강산 문화유산 등을 최첨단 AI 기술로 실감 나게 가상 복원하여 전시하는 사업이다. 현재 북한의 문화유산은 정세 경색으로 우리가 직접 접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 가상의 남북 공동전시도 가능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라는 복합유산으로 등재한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자는 구상이다.
2027년에도 세계적인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Festival)를 한반도 평화축전으로 승화시키자는 구상이다. 마침 2027년 8월경 서울에서 전 세계 청년들이 모이는 대규모 가톨릭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청년들이 서울에 모여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세계청년평화정상회의'를 추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협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원산 갈마 국제해양관광지구를 방문하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다.
이러한 흐름을 2028년 LA올림픽으로까지 이어가는 것이 이 평화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동서 냉전의 장벽을 허문 화해의 장이었듯, 40년 뒤 2028년 LA올림픽을 글로벌 평화의 제전으로 만들자는 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LA올림픽에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이재명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하고, 중국, 러시아 정상도 한 자리에 모여 스포츠를 통한 화합을 전세계에 보여주자는 제안이다. 실현 가능성은 두고 볼 일이지만,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다. 내년 2월에 재개하는 평창 평화포럼이 이런 꿈을 향해 '빌드업'하는 첫걸음이다. LA올림픽을 목표 시한으로 설정함으로써, 앞으로 로드맵을 단계적으로 실행해가자는 전략적 시간표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제안들은 필자를 비롯하여 한국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이미 경험한 사례를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관련국가들 뿐만 아니라 민간과 국제사회의 의지와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비전의 제시다. 아무런 큰 그림 없이 그때그때 위기 대응에 급급한 지금의 상황을 바꿀 출발점은, 상상력과 용기를 가지고 평화의 이정표들을 제시하는 데 있다. 바퀴는 벌써 굴러가고 있다.
9·19 군사합의로 상징되는 군사적 신뢰구축은 한반도 평화의 이정표 가운데 한 축이었다. 앞으로 문화·스포츠·청년 교류를 통한 '문화적 신뢰구축'을 추진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향한 입체적이고 지속가능한 추진력을 만들어야 한다. K-컬처의 나라 코리아이기 때문에 꿈꿀 수 있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하다.
오늘 9·19 군사합의서에게 물었다. 9.19 군사합의가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첫 단추였다. 비록 잠시 풀려났으나, 새로운 손길이 다시 끼워주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이뤄낸 남북 간 약속들을 헛되이 하지 말고 지켜나가야 한다. 나아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창의적인 평화 구상으로 그 약속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워 이사 겸 K컬쳐 평화포럼 대표
김창수
* 필자 소개 : 현 사의재 통일팀장, 코리아연구워 이사 겸 K컬쳐 평화포럼 대표,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평통 사무처장 역임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NSC 선임행정관을 지냈음. 시민사회에서 민화협 정책실장, 고구려전 추진위 정책팀장을 맡은 경력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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