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18 10:53최종 업데이트 25.09.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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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당대의 지성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지배계층을 위한 수탈적인 제도를 국가 실패의 이유로 꼽으며, 포용적인 제도 설계가 부유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라고 강조한다. 이 시각에서 보면 노란봉투법은 포용적인 제도로 대한민국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노란봉투법 개정 이후에도 지속되는 논란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중앙일보> 칼럼(9/2)중앙일보 PDF

하지만 노란봉투법 개정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보수 언론과 경제지는 거의 매일 법안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며 왜곡과 과장된 보도를 서슴지 않는다.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원청이 실질적으로 지배·개입하는 경우 원청이 교섭에 응할 책임을 지도록 하고, 불법 파업 참가자에 대해서는 노조 내 지위와 관여 정도에 따라 책임을 객관적으로 묻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 법이 시행된다고 해서 하청 노동자가 원청의 직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불법 파업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 언론과 경제지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국내외 기업이 한국을 떠나 하청 업체가 문을 닫고, 결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불안을 부추긴다.

이런 가운데 오랫동안 원·하청과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연구하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온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노란봉투법을 강하게 비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교수는 국민경제 혼란을 막고 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란봉투법보다 정규직 노조의 양보와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임금 인상에 따른 비용 상승을 떠안는 '쿠션' 역할을 한 결과 정규직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하청 노동자는 열악한 처우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노란봉투법의 취지를 살리려면 정규직 노조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 양보와 자제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역설적으로 피해는 하청업체와 하청 노동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억울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했다.

보수언론, 경제지 등과 얼핏 겹쳐 보이는 듯한 주장으로 차분히 살펴보면 사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무리한 예측이 적잖다.

정규직이 하청노동자 문제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

첫째, 정규직 노동자를 원·하청 관계의 최대 수혜자로 보고 이들이 양보해야만 노란봉투법이 성공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주장이다. 하청 생산방식의 최대 수혜자는 정규직 노조가 아닌 기업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많은 기업이 물량도급이 아닌 불법파견 형태로 하청을 활용해 온 것은 이미 법원 결정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더욱이 하청 생산방식은 회사의 전략적 의사결정이며 정규직 노조와 상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14%에 불과해 모든 기업이 노조와 상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노조와 상의한다고 해도 기업의 결정을 무효화 할 수 있는 노조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정규직 노조에게 왜 투쟁을 통해 하청을 막지 못했는지 물을 수는 있지만 정규직 노조를 하청 생산의 최대 수혜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둘째, 보수언론과 경제지, 이 교수의 논지는 산별노조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산별노조는 정규직은 설득하지 못하면서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는 조직이다. 민주노총이 다수인 산별노조가 정규직 조합원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다만 조합원을 설득조차 못 하는 노동조합은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고 내부 분란이 깊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상식으로는 지금의 주요 산별노조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최근 국회의 사회적 대화에도 참여하기로 했고, 이에 반대하던 간부들도 조직적 결정에 따르고 있다. 또한 양대 노총 모두 하청 노동자의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의 정당한 행사다. 이를 두고 세력 확장에 몰두하는 조직이란 표현은 노조의 정당한 활동을 폄훼하는 것이다.

노란봉투법 때문에 기업 탈출?

지난 8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노란봉투법)'이 통과되자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과 조합원, 진보당 당원들이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셋째, 기업전략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이 교수는 기고문에서 기업의 4가지 옵션(무대응, 자본 파업, 응답, 자본 탈출)을 제시한 뒤 자본 탈출이 유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중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무대응이나 자폭과 같은 자본 파업은 애초 선택지라고 보기 어렵다. 남은 것은 응답하는 것과 한국을 탈출하는 것인데 이 교수가 예측한 자본 탈출은 과도한 주장에 가깝다.

기업이 노란봉투법 때문에 한국 생산을 포기하는 것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해외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 현지 국가의 기술 수준, 제도와 문화적 차이, 법적 위험 등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의 조선업은 해외에 일부 공장을 두고 있지만 수주 물량을 대체 생산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순전히 인건비 때문에 공장을 옮겨야 할 기업이라면 이미 중국, 베트남 등으로 생산을 옮긴 상태이다. 단지 싼 인건비에 하청을 쓸 수 있다는 이유로 한국에 남아 있는 기업이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다.

기업의 총이윤 중 해외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지금은 해외 생산을 할 수 있으면 여러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국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은 반드시 부정적이지만 않다. 더 넓은 시장을 향해 기업의 해외직접투자를 독려하는 것이 나은 이유다.

아마도 다수의 기업은 노란봉투법을 불가피한 현실로 수용해 대응하는 선택을 취할 것이다. 이미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여러 기업이 각각의 처지에서 교섭 방식 등에 대해 내부 토론을 시작한 상황이다. 고용노동부의 매뉴얼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넷째, 이 교수는 노란봉투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규직 노동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원·하청 관계의 최대 수혜자인 기업이므로, 기업이 먼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의 일시적 부담 증가로 정규직 노조가 자발적으로 양보를 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율적 선택이지 강요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더구나 대기업의 잘못된 경영 판단을 노동조합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노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크다.

노란봉투법, 문재인 정부 최저임금 인상 정책으로 만들려는 보수언론

고용형태공시제에 따르면, 우리나라 300인 이상 대기업은 전체 인력의 17.7%를 하청으로 쓰고 있다. 하청의 전반적인 노동조건은 원청 대비 60% 수준에 불과하다. 하청노동자는 임금 등 처우를 개선할 수단이 없었고 힘겹게 노동조합을 만들 경우 원청은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원청은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하청방식의 생산을 늘려왔다. 원청은 이 과정에서 절감한 비용으로 정규직 직원들에게 많은 보상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규직 노조에 양보와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정규직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몇몇 보수 언론과 경제신문은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최저임금 인상이 정부를 곤란하게 몰아갔던 것처럼, 노란봉투법도 같은 길을 가길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란봉투법은 진짜 사용자를 사용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40년 동안 버텨온 노동자들에게 주는 작은 기회이자 선물이다. 다른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 자신만의 이익을 키우는 방식으로는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노란봉투법이 개정된 지금,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두고 소모적인 반대를 반복하기보다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원청은 하청노조와의 교섭 방식 등을 고민하거나 이번 기회에 사내하청 생산 방식을 자회사 등으로 내부화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남은 6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구체적인 지배·개입 기준과 교섭 단위 분리, 교섭 방식 등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마련해 불필요한 노사 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 노동조합 또한 노란봉투법을 근거로 사용자를 일방적으로 압박하기보다 기업의 일시적 부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정규직 노동자들도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하청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노란봉투법은 노사정이 자율적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본인 제공

필자 소개 : 정흥준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소셜 코리아> 편집위원입니다. 학교에서 노사관계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로 강의하며 간접고용 비정규직과 노동조합 등에 관해 연구합니다. 주요 저서로 <오줌인형 잡기> 등 6편의 편저가 있으며 국내외에서 5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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