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16 12:07최종 업데이트 25.09.1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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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모든 것을 멈추자'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가르 뒤 노르(Gare du Nord) 역 앞에 있는 시위자들의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지난여름 내내, 프랑스 소셜 미디어에는 "9월 10일, 모든 것을 멈추자(Bloquons TOUT)"는 구호가 떠돌았다.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디선가 마땅히 터져 나와야 할 외침이었기에 이 구호는 일파만파 퍼져갔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미디어가 9월 10일로 예정된 봉기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멈추자"는 말은 명확히 총파업을 의미했다. 좌파 계열 노동조합 CGT(노동총동맹)와 SUD(연결·단결·민주)가 이에 화답하며, 이날 파업과 집회 참가를 조합원들에게 독려했다. 정치권에서는 LFI(굴종하지 않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녹색당, 공산당, 사회당 등이 차례로 지지를 표했다.

마침내 9월 10일. 전국 모든 대도시에서 자발적 시민들의 참여로 집회가 열렸다. 파리, 마르세유, 리옹, 보르도, 낭트, 스트라스부르, 브레스트, 몽펠리에, 릴, 렌... 경찰 집계에 따르면 17만 5000명이, CGT 집계에 따르면 25만 명이 참여했다. 프랑스 내무부는 이날 하루 812군데에서 집회 혹은 집단 행동이 행해졌고, 8만 명의 경찰 인력이 투입되었다고 밝혔다.

필자는 가족, 친구들 7~8명과 함께 파리의 한 집회 장소였던 샤틀레(Châtelet)로 향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8할은 20대 청년들이었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으로 가는 모든 길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구호와 노래를 연호하며 행진을 거듭하다가, 길이 막히면 또다시 다른 길로 틀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다. 집회 시간과 출발점, 종착점이 정해진 기존 집회와는 완전히 다른 리듬 속에서 10일의 봉기는 오전 6시부터 밤까지 도시 곳곳에서 이어졌다.

"마크롱 퇴진" "안티, 안티, 안티 캐피탈리스트"
"우린 모두 가자(GAZA)의 아이들!" "안티 안티 안티 파시스트"

이날 거리를 지배한 대표 구호들이다. 시위대는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사임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극우 정당 RN(국민연합)을 파시스트로 규정하면서, 그들에게도 권력을 허락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시위 군중들이 들고 나온 피켓에는 "부자에게 세금을!", "매년 조세피난처로 새는 돈이 1000억 유로(약 163조 원)야. 그런데 기초연금이 문제라구?"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위대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180도 수정할 것을 명한다. 프랑스에 닥친 재정 위기를 해결하고 싶다면, 또다시 서민의 희생을 요구할 게 아니라 '부자 과세'에서 찾으라는 주문이다.

프랑스에 닥친 재정 위기, 무슨 일 있었나

지난 4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의지의 연합 정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7년, 마크롱이 집권하면서 처음 행한 일은 부유세(ISF) 폐지였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집권했던 2007년부터 강력한 긴축의 흐름은 시작되었으나, 마크롱 정권은 그중에서도 남달랐다. 로스차일드가의 은행 펀드 매니저로 커리어를 시작한 마크롱은, 프랑수아 올랑드의 경제자문으로 발탁되어 재벌들의 이해를 대변했고, 결국 그들의 지원으로 창당해서 대권을 거머쥐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마크롱의 첫 번째 업적으로 꼽히는 부유세 폐지는 그가 지지층에게 바친 상징적 선물이었다. 고소득층에게 부과하던 이 세금( 금융자산에 대한 세금은 없애고 부동산 자산에 부과하는 세금만 남김)이 사라지면서 연간 약 15억 유로(약 2조 4400억 원)에 달하는 세수가 증발했다. 기업의 법인세도 33%에서 25%로 대폭 축소시켰다. 이는 연간 180억 유로(약 29조 3000억 원)의 세수를 사라지게 했다. 비교적 높은 세율을 적용해 오던 상속세율도 하향 조정, 자산가들이 부담 없이 재산을 상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부자들의 세금을 알뜰살뜰히 감면해 준 결과, 2023년 기준, 대략 670억 유로 (약 100조 원)의 세수가 사라졌다. 대신 20년 전에 비해 상위 500명의 부자들의 자산은 7배로 늘어났다.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는 세계에서 백만장자가 3번째로 많은 나라(미국, 중국에 이어)로 등극했다.

나라 안에 부자들이 넘쳐나면 경제가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 마크롱 정부가 취한 명분이었다. 그러나 부자 감세가 해를 거듭하자, 재정 적자(GDP 대비 114%)가 산더미처럼 늘어갔고, 빈곤층도 함께 증가했다(2002년 6.5%에서 2023년 8.5%) .

평생 부자들을 연구해 온 사회학자 커플 팽송-샤를로 부부는 2019년 <울트라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저서를 통해 마크롱의 정치를 "가난한 자들의 돈을 가져다 부자들을 먹이는 정치"라고 묘사한 바 있다. 부자 감세를 통해 재정 적자를 만든 마크롱 정부가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가혹한 공공 분야의 긴축과 복지의 축소를 진행해 나갔기 때문이다.

마크롱은 집권 초 5년간 공공 분야의 인력을 12만 명 감축시키고, 600억 유로(약 97조 7000억 원)의 공공지출 축소 계속을 밝혔다. 이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는 교육과 의료였다. 공립학교에서 교사가 병가를 내고 며칠간 나오지 않아도, 대체 교원이 충원되지 않는 풍경은 일상적인 모습이 되어갔다. 병원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 와도 의료진이 부족하거나, 환자가 복도에서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도 발생했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교부금도 매년 100억 유로(약 16조 원)씩 삭감했다. 일련의 예산 감축은 교육과 의료, 문화를 비롯한 전반의 영역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했을 뿐 아니라, 특히 저소득층 시민들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집세 보조금을 축소시켜 400만 명 이상의 저소득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부자들이 내는 세금은 감면했지만, 모두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오히려 증세했다. 사회보장세(CSG)를 1.7%p 일괄적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2018년 유류세까지 올리려던 마크롱 정권은 마침내 노란조끼 운동이라는 거대한 시민운동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온 나라를 뒤흔드는 위력적 저항을 이어가던 노란조끼들(소외된 서민층이 주축이 된 풀뿌리 저항운동)이 마크롱에게 제시한 요구한 중 하나가 부유세의 부활이었다. 서민들의 지갑을 쥐어짜는 대신, 부자들로부터 마땅히 취해야 할 세금을 받으라는 정당한 요구였다. 그들이 제시한 다른 요구안엔 타협안을 제시했던 마크롱은 부유세 부활에 대해선 단호히 선을 그었다.

무엇보다 마크롱 집권 8년이 프랑스 사회에 가져온 가장 큰 타격은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와 그로 인해 깊어진 계급적 갈등이다. 2024년 7월 프랑스의 경제지 <챌린지>는 프랑스 500대 부자의 자산이 프랑스 GDP의 4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년 전 이 숫자는 20%에 그쳤다. 그들의 부가 넘쳐흐르는 동안 나라는 빚더미에 놓였고, 빈곤층도 함께 증가했다. 팽송-샤를로 부부의 연구에 따르면, 조세피난처로 유출되는 프랑스의 자산은 매년 1000억 유로(약 163 조 원)에 이른다. 부자들은 넘쳐나는 부를 사회를 위해 재투자하는 대신, 숨겨놓기 바빴다.

"나라의 돈이 사람을 죽이는 데만 쓰이고 있다"

'모든 것을 멈추자' 집회에 참석한 한 시민이 들고 있는 피켓에 "조세피난처로 (매년) 새는 돈이 1000억 유로야. 그런데 기초 연금이 문제라고? 시민계급을 더 이상 멸시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목수정

여기에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이 재정 건정성 악화에 결정타를 날렸다. 팬데믹을 맞이한 마크롱 정부는 과도한 봉쇄 정책으로 경제를 마비시켰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원금을 안겼다. 그 뒷감당에 대한 어떤 대책도 없이. 2022~23년 동안, 마크롱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퍼부어왔고, 2025년에도 20억 유로(약 3조 2000억원)을 약속한 바 있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 10일 파업을 결의하고 집회에 참석한 트농병원(Hôpital Tenon)의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는 군수업체들이 만든 무기를 이스라엘에 팔고, 그것은 가자 주민들을 학살하는데 사용됩니다. 국가는 그렇게 번 돈을 병원이나 학교에 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우크라이나)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 쓰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제정신입니까? 프랑스의 병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상적인 인력부족 상황에서 간신히 지탱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집권 초인 2017년 6월 마크롱은 "기차역은 성공하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교차하는 장소다" 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이 말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기에, 큰 파장이 일어났다.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존재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사회보장에 대한 지출을 '미친 돈(pognon de dingue)'이라 표현하고, 실업 수당을 받는 구직자들을 게으른 사람들처럼 규정하면서 사회를 균열시킨 대통령의 태도는 이때부터 예고되었던 셈이다.

사회보장 제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프랑스가 서로를 부축하며 지탱할 수 있는 안전망을 건설하기 위해 1945년 10월 제정되었고, 오늘의 프랑스를 만든 사회적 연대의 토대다. 그것이 잘 작동할 때 프랑스는 성장했고, 그것이 긴축의 이름으로 짓밟힐 때, 분열과 퇴보를 거듭했던 사실을 프랑스인들은 잘 알고 있다.

'특권은 절대 내려놓을 수 없지'

지난 10일 프랑스 전역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멈추자' 집회 모습, 파리 샤틀레 부근 "비참을 심은 자, 분노를 거두리라" 고 쓴 피켓이 보인다.목수정

지난 1월, 프랑스 상원은, 전직 대통령들과 총리들에게 지원되는 재정적 특혜들을 폐지하는 법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긴축을 강요하는 시절에, 위로부터 특권 내려놓기를 실천하자는 의미에서 제안된 법안이었다.

특권 폐지의 범위가 전직 대통령과 총리·장관·국회의원 그리고 전직을 너머 현직들에게까지 적용된다면 상징적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에서도 분열된 프랑스를 다시 하나로 모아 일으킬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을 터다. 그러나 법안이 하원으로 다시 내려오고, 상하원 간 이견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당시 총리였던 프랑수아 바이루는 이 법안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안타깝게도, 상하원 조정위원회는 이 값진 법안을 기각시키고 만다.

이제 막 총리가 된 바이루는 자신이 조만간 누리게 될 특권을 삭제하자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자가 지난 7월, 국민들 앞에 내놓은 예산 삭감안은 국민들을 다시 아연하게 만들었다. 440억 유로(약 65조 원) 규모의 긴축 예산안은 이틀의 공휴일 축소와 함께 다시 한번, 대규모의 교원 축소, 대학 교육 예산 감축, 병원 인력 축소, 사회보장 지원금, 장애인, 노인 복지 축소, 공공 병원 지원 축소, 건강 보험 보장 범위 축소 등을 담고 있었다.

지난 시간의 경험은 명백히 부자 감세가 나라의 국고를 축낸 주범임을 보여주었건만, 이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다는 듯 행동했다. 이 잔인하고 일방적인 예산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고, 총리 교체(의회에서 불신임)와 9월 10일 봉기의 직접적 계기를 제공했다.

2018년 노란조끼의 봉기, 2023년에는 4개월 동안 기록적으로 이어진 전체 노조의 총파업, 야권의 압승으로 끝난 2024년 조기 총선. 이처럼 국민들은 연거푸 방향 전환을 명했건만, 마크롱 정부는 기어이 부자들의 뜻만을 받들고자 한다. 9월 4일 <르 피가로>가 발표한 설문조사(odoxa-backbone consulting)에 따르면, 마크롱의 지지율은 15%로 추락했고, 그의 사임을 원하는 국민들은 64%에 이른다.

프랑스 국민들은 알고 있다

지난 8일 프랑스 총리 프랑수아 바이유가 신임 투표를 앞두고 하원 연단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 신임 투표는 프랑스 총리가 헌법 제49조 제1항을 발동한 데 따른 것이다. 신임 투표에서 패배하면서 총리를 포함해 내각이 총사퇴하게 됐다. EPA/연합뉴스

"모든 것을 멈추자"던 대담한 구호에 비하면, 10일의 거사는 사실상 나라를 멈추진 못했다. 그러나 8만 경찰 병력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모습에서, 권력은 떨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들켰다. 얼굴도 모르는 이가 주창한 집회에 모인 25만 시민들의 분노는 18일, 프랑스 전체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시위와 파업으로 바통을 넘겼다.

이로부터 닷새 뒤인 23일엔 LFI의 발의로 마크롱에 대한 탄핵 표결이 국회에서 진행된다. 정치공학상의 셈법을 따르자면, 탄핵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진 않지만 국민들이 보여줄 거리에서의 목소리, 그것이 만들어낼 에너지가 앞으로의 판도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오늘의 프랑스를 보며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과도한 감세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하는 데 있을 것이다. 정부가 그들의 도둑질을 눈감아 줬을 때, 마땅한 그들의 사회적 의무를 감면해 주었을 때, 그들은 조세 피난처로 자산을 감춰둔다. 그리고 결국 끝없는 희생을 감내한 국민들에게 돌아온 건, 또 다른 희생에 대한 요구였을 뿐이다.

존재가 불안할 때 인간은 성장하기 힘들다. 사회가 합의해 온 근본적 가치를 무시하는 리더 하에서, 프랑스는 초유의 정치 불안을 겪고 있다. 부자들이 탈세해온 세금이 제대로 걷힐 수 있었다면, 오늘의 위기는 결코 오지 않았다.

80년 된 프랑스의 복지제도를 실용적·현실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해도, 제도의 합리적 재건 또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하다. 더 많이 가진자들부터 제 몫의 의무를 다할 때, 연대와 신뢰 속에서 현명한 개혁이 가능해진다.

불행 중 다행인 건, 프랑스 국민들이 이 난국의 해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을 겁박하기 위해 그리스 사례를 꺼내며 '희생하라' 요구했던 파렴치한 총리, 국민들은 그를 비웃으며 내쫓았다. 권력은 이미 허둥대기 시작했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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