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영구 불임 예상 난자·정자 냉동 지원사업을 소개하는 보건복지부 카드뉴스
보건복지부
합계출산율 1 미만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한 국가적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 한 달 전쯤, 보건복지부는
'영구 불임 예상 난자·정자 냉동 지원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저출생 추세 반전'이나 '건강한 임신출산 환경 조성' 같은 표현이 익숙하다. 얼핏 보면 인공수정과 체외수정에 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난임부부지원사업의 후속편 같기도 하다.
후속편의 흥행 공식을 따르듯, 더 과감하게 연령, 소득, 결혼 상태의 제약을 완전히 없앴다. 사업의 대상자는 '의학적 사유로 인하여 영구 불임이 예상되는 남녀'다.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4조로 규정하는 의학적 사유란 생식기를 절제 및 적출하는 수술을 받거나, 항암치료 및 염색체 이상으로 인해 생식기의 기능이 저하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생식세포를 보존하면, 모종의 이유로 생식기나 생식능력을 상실하더라도 훗날 사랑하는 파트너와 가족을 도모할 수 있다.
보조생식술 지원사업이 도입되어 확대되어 온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머지않아 사업대상자를 '건강한 가임기 남녀'로 완화하거나, 1년에 N번으로 지원범위를 확대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입시와 취업, 재산형성과 경력개발에 치이는 삶을 살아온 한국인들은 '나를 닮은 나의 아이'를 위해 가장 젊고 건강한 시절의 생식세포를 보존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겠다. 번식이 인간의 본성이어서가 아니라, 능력제일주의인 이 사회에서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본인의 세포적 노화로 인해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발달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다.
난임 지원의 윤리적 딜레마
우리는 의학적 사유든, 비의학적 사유든, 생식세포 동결을 지원하는 사업이 내포한 임상적, 경제적, 윤리적 쟁점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개인이 지불한 비용의 절반을 지원하는 현재의 사업 구조는 동결 후 보관과 그 이후 활용에 대해선 보장하지 않는다. 인구 고령화에 힘입어 우후죽순 생겨났던 실버타운마저 파산을 면치 못했다. 2014년 전체 난임시술기관 292곳 중 79곳(27.6%)에서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율이 0%에 달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난임시술의 질관리와 함께 '정부지정 난임 시술기관'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시술기관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없다면, 동결한 생식세포가 5년, 10년 이상 같은 의료기관에 안전하게 보관될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인가. 미래를 상품화해 세간의 관심과 투자금을 흡수한 다음 나 몰라라 하는 행태가 반복되진 않을까 불안함이 피어오른다.
둘째, 보조생식술과 마찬가지로 동결을 위해선 인위적으로 생식세포를 채취해야 한다. 여성들은 과배란 유도제를 주사하고 호르몬 불균형을 포함한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즉, 체외수정이나 인공수정을 곧장 진행하지 않을 뿐, 보조생식술을 준비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럼에도 이 사업은 보조생식술을 지원하는 기존 난임부부지원사업과 마찬가지로, 생식세포를 떼어낸 이후 여성의 건강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이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를, 머지않은 시기일 수도,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임신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부작용을 오롯이 감수하는 것이 건강한 임신출산 환경일까.
셋째, 현재 의학적 사유로 인정하는 범위에는 '자궁적출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궁부속기, 부속기종양, 난소, 하물며 고환과 부고환을 떼어내야 한다면 가임력을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조차 자궁을 떼어낸 여성은 지원하지 않겠다고 한다.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서 일까. 그렇다면 생식기와 생식능력을 상실하기 전 난자와 정자를 동결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미래에 누구의 몸을 빌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가임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누구를 위해 보존되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일 가정 양립이란 구호조차 일과 가정 모두 남부럽지 않게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된 지 오래다. 젊음을 연료 삼아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난자와 정자만 얼려두면 연애나 결혼은 원하는 만큼 미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제안은 과연 저출생 추세를 반전시킬 수 있을까.
해외에서도 난자 동결은 논쟁적 주제다. 생식을 다루는 유럽과 미국의 학회조차 난자 동결은 오랫동안 "실험적"인 기술이었다. 지나치게 기술의존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통제하려는 시도라는 우려부터 장기적인 영향과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장치로 심심찮게 등장하던 기술인만큼 상업적으로 악용될 위험도 컸다. 생명경시, 낮은 비용효과성, 의료상업화의 문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35세 생일이 ‘출산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시대, 값비싼 난자 냉동 시술을 마음의 평화로 포장해 권유하는 현실을 풍자한 단편영화 <프리즈>
Maya Albanese
'다음' 난임 지원
그럼에도 미국생식의학회와 유럽생식및발생학회는 차츰 태도를 선회해왔다. 질병이나 치료과정에서 가임력을 상실할 경우 제한적으로 의료적 필요를 인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계획적, 선제적 조치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보조생식술에서 냉동난자나 동결배아를 활용하는 선택지가 가능해졌고, 여성들을 '생물학적 시계'나 재정 및 정서 상태를 포함한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가능성처럼 홍보되었다.
하지만 안전성이나 효과성이 확보되고, 비용의 부담이 낮아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 학회가 기술을 인정해 지침을 개정하면서도 유전적 부모 역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성소수자나 다양한 가족 형태가 늘어나는 사회에서 난자 동결이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해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한국에서 의학적 사유가 아닌 사회적, 계획적, 선제적 목적의 난자 동결이 허용되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어떤 가족과 어떤 생식의 형태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
지난 2021년 당시 이재명 후보는 난임시술을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로 비유하며 난임부부의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여러 공약을 제시했었다. 보조생식술을 무한리필식으로 지원범위를 확대하는 대신 '난임부부를 위한 심리상담'을 국정과제에 포함한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바라건대, 누구라도, 어떤 형태라도, 가족을 형성해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가파른 인구절벽에서 추락하지 않을 발판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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