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디자이너의 '병원 경험 서비스 디자인' 아이디어는 국내 대형 병원에 모두 적용됐다. 사진은 서울보라매병원의 응급실 진료상황 화면.
이경미
의학 드라마를 보면 응급실 환자들이 간호사나 의사를 붙잡고 '우린 언제 봐주냐'라며 다급하게 묻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실제로도 이랬던 응급실이 언제부터인가 바뀌었다. 대형 병원 응급실에는 환자별로 담당 의사, 간호사 이름과 검사까지의 소요 시간 등이 정리되어 나오는 화면이 있다. 이를 기획해 응급실 풍경을 바꾼 이는 디자이너다. 현대자동차와 LG전자를 거쳐 40년간 민간기업, 병원, 공공기관의 제품 및 서비스 디자인을 해 온 이경미 더공감 대표다.
이경미 대표는 다양한 디자인 경험을 살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포용디자인과 삶'관의 큐레이터를 맡았다.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등을 고려한 국내외 포용디자인 33개 전시 사례를 직접 섭외했다. 사단법인 무의가 참여하는 경사로 설치 확산 환경조성 프로젝트
'모두의 1층'도 초청을 받아 영상을 전시한다. 이 대표를 6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 디자인 경력이 40년째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후 대기업에서 15년, 독립해 설립한 사이픽스에서 25년간 제품·서비스 디자인을 해 왔다. 처음 현대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어 울산에 갔을 때는 여직원이 드물어 내가 지나가면 '여자 지나간다'며 몰려오던 시절도 있었다. 디자인을 통해 사회적 가치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2000년 독립했다."
- 제품 디자이너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이력을 보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키마우스 MP3인 엠플레이어가 있다.
"당시 1020세대를 사로잡아 80만 대가 팔렸다. 대표 의지가 확고했다. MP3는 아이팟 등 외국 제품이 많았는데 젊은 여성들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국산 MP3를 만들자는 거였다. 전통적인 육각형 가습기 모양이 아닌 '물방울 모양의 가습기' 디자인 개발도 기억난다.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밤에 틀어놓고 자면 물이 고이지 않아 위생적인 제품을 만들자는 목표가 있었다(물방울 가습기는 각종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 병원 서비스 디자인을 많이 바꾸고 한국디자인진흥원 의뢰로 정형외과의 환자 경험과 대기 시간을 줄이는 컨설팅도 했다.
"서비스디자인엔 내 정체성이 더 투여된다. 공공, 사회 영역에 관여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사람 중심의 맥락을 볼 수 있다. 서비스 디자인차 처음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간호사가 다 땅을 보고 다니더라. 환자들과 눈 마주치면 '우리 선생님 언제 오세요?'와 같이 당장 답변이 어려운 질문을 쏟아내서다.
애타고 궁금한 환자와 대형 병원 특유의 의사 배치 구조를 분석해 이를 환자에게 잘 보여 줄 화면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온 게 담당 의사, 간호사, 대기시간, 검사 소요시간 등을 보여주는 전광판이었다. 이렇게 나온 컨설팅 결과가 형태는 약간씩 다르지만 모든 대형 병원 응급실에 적용되고 있다. 서울시설공단 의뢰를 받아 고척돔 안전 디자인 컨설팅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노란 바닥 스티커를 따라가게 동선 디자인을 했었다."

▲이경미 디자이너가 자문한 서울 고척돔의 색깔 바닥띠. 유동인구가 많고 길이 낯설 때 유용하게 쓰인다.
홍윤희
- 사단법인 무의가 접근성 문제를 제기하던 때 고척돔에서 휠체어석 예매 의무화 규정을 만들었다고 해서 가보니 휠체어석 이용자들이 보기 편하게 바닥에 색깔 띠가 있어 신기했다.
"사실 컨설팅 내역엔 더 많은 내용이 있었다. 고척돔 이용자는 야구팬과 콘서트팬으로 나뉘는데 이용자 경험이 완전 다르기 때문에 바닥에 빔을 쏴서 출구를 안내하라 등의 제안도 있었다. 예산 부족으로 다 반영은 하지 못하더라."
디자인은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 비엔날레에 포용 디자인 사례를 많이 모았는데 장애인, 노약자 관련 서비스 디자인에 원래 관심이 있었나?
"일본 전람회 행사에 갔는데 한국과 달리 휠체어 탄 관람자들이 엄청 많더라. 그때 한일 인구수 대비 장애인 비중을 비교해 봤는데 거의 비슷한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휠체어 이용자들이 거리에서 안 보인다. 물리적 인프라도 그렇지만 인식 인프라가 낮아 장애 당사자들이 외출하면 환대받지 못한다. 그래서 못 나오는 것이다.
장애 당사자를 자주 만나고 접하는 일상의 중요성도 알았다. 2009년 성공회대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다가 옆 특수학교에서 한 달 동안 장애 학생들에게 미술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하며 친해지니 자폐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2016년 서울시와 함께 '인지건강 디자인' 컨설팅을 한 적이 있다. 치매 어르신들의 삶을 관찰하고 외출을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할지 연구했다. 어르신이 외출하려 하니 밖에 나가서 실수할까 봐 물을 안 드시더라. 알고 보니 외출 동선에 개방화장실이 거의 없더라. 젊은이들은 카페에서 음료수라도 사 마시고 화장실을 이용하지만 어르신들은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개방화장실 확보를 위해 동네 교회 등을 섭외했지만 다 거절했고 결국은 공공건물로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걷기 힘들고 길눈이 어두워지는 어르신들에게는 벤치가 필요하다. 50미터 간격으로 벤치를 놓고 번호 등을 크게 표기해 일종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는 컨설팅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치매 어르신을 위한 실내 공간 디자인에도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벽에 패턴이 있으면 안 된다. 망상이 있는 분들에게는 패턴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독거노인의 가구와 공간을 유니버설 디자인해 시범 지역 '노인지원주택'에 설치하기도 했다. 고급 가구는 침대가 높거나 소파가 지나치게 깊고 푹신한데 어르신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하다. 편마비가 있거나 기력 없는 어르신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침대는 무릎 높이로 만들었다. 소파의 깊이는 줄이고 몸을 지지할 수 있게 손잡이를 부착했다. 야간보조등을 놓고 전자기기를 안전히 수납할 공간도 만들었다(이 사례들을
가이드북으로 만들어 서울시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포용디자인과 삶'관에는 30여개의 국내외 포용디자인 사례가 소개된다. 전시장 입구에는 유니버설디자인으로 유명한 글로벌 주방용품 회사인 옥소 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경미
-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포용디자인과 삶'관은 어떤 콘셉트를 갖고 기획했나?
"33개 기관과 기업을 섭외하는 데 7개월 걸렸다. '오마주 전시'인데 디자인으로 사회를 바꾸고 있는 곳을 모신 거다. 사단법인 무의의 '모두의 1층'이 광주에서도 전개되기를 바랐다. 광주의 한 디자인회사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광주 랜드마크에 경사로를 놓거나 접근성을 높이는 활동을 했다. 경사로 설치가 생각보다 엄청 어려웠다고 하더라.
2023년 한 미래포럼에서 '초고령사회, 베이비부머의 체인지메이커 실천선언'을 통해 나왔던 '우디식탁'도 전시된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퇴직 3년 전부터 요리를 배우고, 중증장애인이나 병원 돌봄에 지친 가족들에게 제철 재료로 최고로 환대하는 식탁을 차린다는 프로젝트다. 영리 기업 중엔 토스가 기억에 남는다. '모두의 세계, 각자의 도구'란 주제인데, 사실 웹접근성 이야기가 주인공일 줄 알았는데, 그 접근성 인터뷰에 참여했던 장애 당사자들의 생활과 그들이 일상에서 쓰는 도구 이야기로 풀더라.
무의의 모두의 1층 캠페인은 경사로 설치를 결국 법과 제도를 바꾸는 마중물로 만든 것 아닌가.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거나 편리한 게 아니라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발달장애인을 스마트팜에서 고용하는 농장인 푸르메재단 푸르메소셜팜의 경우 '세상에 없던 일자리를 디자인하다'란 전시 슬로건을 만들어 드렸다. 발달장애인 일자리 창출도 결국 디자인 아닌가. 발달장애인 아티스트를 육성하는 키뮤스튜디오, 청각장애인 드라이버를 고용하는 고요한M을 전시에 모신 것도 비슷한 취지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전시 '포용디자인과 삶'관에 초대된 '모두의 1층' 프로젝트 영상. 경사로를 설치하면 누구나 1층에 들어갈 수 있다는 컨셉의 프로젝트로 접근성의 기본 단위인 경사로 설치와 확대를 위한 환경 조성을 목표로 한다.
홍윤희
'디자인 통한 공감과 환대'가 사회 바꿀 수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섭외 사례는 무엇인가?
"섭외하려 했지만 못했던 디즈니, 나이키 사례들이 맘에 남는다. 디즈니 히어로암(Hero Arm)은 의수 때문에 놀림받던 아이가 스타트업과 협업해 만든 의수를 끼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 반응이 바뀌었다는 사례다. 본사, 한국 지사 등을 다 접촉했지만 섭외하지 못했다. 나이키 고플라이(GoFly) 운동화도 불발됐다. 손힘 없는 사람들이 끈을 맬 필요 없이 버튼 하나를 누르면 발에 맞게 조여지는 운동화다. 미국에선 판매되고 있어 허락만 얻으면 구입해 전시하려고 했는데 결국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 부모님이 휠체어를 이용하셔서 그런지 장애인과 가족의 어려움에 공감을 많이 한다.
"우리 부모님은 외국 여행도 많이 다니셨는데 휠체어 이용 후 여행 경험이 점점 좁아지셨다. 바다를 보여 드리려고 애써 인천에 갔는데 바다가 너무 멀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중 제주도 표선해수욕장에 휠체어 접근뿐 아니라 패들링 등 휠체어 이용자들도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이끼' 프로젝트가 있다는 걸 알고 이번 비엔날레에 초청했다.
확실히 장애인 가족이 있으면 여러 디자인 규칙에 대해 몸으로 공감할 수 있다. 경사로 각도는 완만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실제로 경사로가 완만하지 않으면 휠체어 이용자가 혼자 올라갈 수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포용을 테마로 한 게임인 '포용도감' 전시를 소개하고 있는 이경미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포용디자인과 삶'관 큐레이터
이경미
- 광주비엔날레에 많이 와 주었으면 하는 분들은 누구이고 어떤 가치를 더 확대하고 싶나?
"청소년들이 많이 와 주었으면 좋겠다. '포용도감'이란 전시가 있는데 슬로건이 '포용하지 않으면 죽는다'다. 제한된 시간 동안 마음이 힘든 친구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살리는 게임이다. 말 그대로 게임 룰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왕따나 우울증 있는 친구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다중적 의미다. 이번 오마주 전시는 공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이 만들어 낸 세상, 시선, 질문을 느끼고 가셨으면 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곳이 글로벌 주방용품 옥소 부스다. 전시에 초대된 옥소 디자이너는 35년 동안 재직하며 유니버설 디자인 관점에서 히트 제품들을 만들어 냈다. 손목이 아픈 아내를 위해 만든 감자칼이 전 세계 표준이 된 사례는 유명하고, 샐러드 탈수기 같은 제품은 아이들 장난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포용디자인은 국가적인 문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디자인을 통한 공감과 환대'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는 도로교통공사 직원이 아이디어를 낸 노면 색깔 유도선이 '길치들의 구세주'란 이름으로 전시되어 있다. 예전에 한 강의에서 디자인의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디자인이 소비를 부추길 수도 있지만 노면 색깔 유도선처럼 안전한 운전의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화합시키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는 포용디자인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