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3일 공개된 이주노동자 지게차 결박 인권 유린 사건 영상 속 피해자인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 A(31)씨가 24일 전남 나주시청 앞 기자회견을 마치고 언론 인터뷰하는 모습. 지난 2월 사건에 대한 심경을 밝히는 이날은 A 씨의 서른 한 번째 생일이었다.
김형호
대통령의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 발언 이후, 정부 관계 부처는 언론에 보도된 인권 침해, 임금 체불, 산업재해 사례를 개별적으로 처리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단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개별적 인권 침해로 축소하고, 그 책임을 특정 사업장이나 사업주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법·제도·정책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가려진다.
이것은 몇몇 사업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들은 '고용허가제'로 대표되는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은 처음부터 임시 노동이주 체제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왔다. 현행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국내 체류를 최대 4년 10개월로 제한하며, 가족 동반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이주민의 영구적 정착을 막고,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구조다.
하지만 이렇게 임시 체류만 허용하는 제도는 많은 이들을 미등록 상태로 내몰며, 가장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되게 만든다. 결국 이 정책의 본질은,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해 인력 부족을 메우고 자국의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데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노동력을 수탈해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오늘날 선진국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불러들여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이 착취 구조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임시 노동이주 체제다. 인간을 단순히 '사용가치'와 '노동 추출 가능성'으로만 평가하고,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민낯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임시적 존재
이주 및 디아스포라 연구자인 로빈 코헨(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국제이주연구소장)은 초과 착취 상태에 놓인 이주노동자를 고대 스파르타 사회의 노예인 '헬롯'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이들이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박탈당한 존재라고 지적했다.
즉, 국민국가의 시민이 아닌 경우 기본적 권리 보장이 제한되는 현실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과 시민권 획득이 불가능한 이주노동자는 '시민이 될 권리'조차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권리는 제한하고, 노동력만 추출하는 이주노동정책은 초과 착취를 구조화하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로빈 코헨이 말한 '현대판 헬롯'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는 다양한 형태의 제한된 임시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고용허가제 노동자( 임시 체류만 허가되며, 체류 기간은 최대 4년 10개월, 가족 동반도 불가), 미등록 체류자(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는 법적 불안정 상태), 인도적 체류자(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임시적 지위), 계절노동자( 단기간 노동 후 출국을 전제로 하는 고용 형태), 난민신청자(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불안정한 상태) 등이다. 이처럼 영구 정착이 제도적으로 차단된 이들은 모두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임시 체류자'다.
이러한 제도적 불안정성은 곧 노동현장에서의 안전 문제와 권리 침해로 직결된다. 부당한 업무 지시, 위험한 작업환경, 차별적 대우 앞에서도 이들은 '거부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산업의 최하층에서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로빈 코헨이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현대의 헬롯들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수많은 산업현장 한가운데에 있다.
안정적 취업비자와 장기 체류권, 그리고 시민권

▲지난 7월 29일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이희훈
나주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사건 이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단편적인 사안으로 다루지 말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제를 발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이 차별 없이,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으며,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문제의 근원부터 직시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인권침해는 단지 일부 사업장의 일탈이나 관리자의 악의적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국가 정책과 제도가 만든 구조적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을 '임시 노동력', 곧 소모품처럼 다루는 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장에서 권리를 말하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쓰러지고, 잊히는 현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정부 부처의 일회성 현장 방문 같은 전시행정이나 고용허가제 일부 조항의 미세 조정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제도의 뿌리를 바꾸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 진정한 변화와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현행 고용허가제에서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사업장 변경 제한'이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열악한 처우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도 이주노동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고용허가제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임시 노동 이주 체제인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취업비자와 장기체류권, 나아가 시민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 아울러 짧게는 5년, 길게는 30년 넘게 한국 사회에서 일하며 지역의 일원으로 살아온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는 체류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들은 더 이상 '임시 체류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만약 이러한 정책적 재구성 없이 이주노동자 정주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현대판 노예 `헬롯'을 단지 이 땅에 묶어 두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곧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한국 사회가 성장을 지속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주민을 단순한 경제적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이자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정책이다. 노동하는 이주민이 '권리를 가질 권리'를 회복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근본적 변화의 방향이다.
▲서선영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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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 서선영은 이주학(migration studies) 전공자로, 현재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 계급, 정체성, 도시 공간에 관심을 두고, 네팔에서 한국으로의 노동이주를 오랫동안 연구했으며, 최근에는 예멘 난민 문제를 다뤘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이주노동연구모임 마르코'에서 동료 연구자·활동가들과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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