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묘 내의 망묘루.
김종성
1793년 5월 16일, 서울에는 비가 많이 왔다. 이날, 정조 임금은 여름 제사의 제수용품들을 확인하고자 빗속을 뚫고 종묘로 행차했다. 이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정조 17년 4월 7일 자 <정조실록>은 "태묘로 나아가 하향(夏享)의 희생물과 그릇을 살펴보셨다"고 기술한다.
정조는 그날 밤을 망묘루에서 보냈다. 이처럼 망묘루는 군주가 휴식뿐 아니라 수면도 취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왕조시대에는 특히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기 때문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왕실 인장 그림을 거기에 보관했다. 영조 30년 12월 14일 자(1755.1.25.) <영조실록>은 "주상이 태묘에 소장된 금보도식(金寶圖式)을 가져다 보고 망묘루에 다시 봉안했다"고 알려준다. 종묘 망묘루가 금보도식의 보관처였던 것이다.
정조는 27세의 젊은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열 살 때 목격했다. 그 뒤 정조의 일생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험난한 투쟁의 길이었다. 정조의 개혁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것을 성취하는 과정이었고, 정조가 칼날을 겨눈 개혁 대상들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력이었다.
그처럼 아버지에 대한 한이 사무쳤던 정조가 지금의 서울대병원 마당에 세운 것이 경모궁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당인 이곳 내부의 망묘루에 애착을 보였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하고 그런 시를 걸어놓기도 했다.
1791년 11월 2일, 39세 된 정조의 초상화가 완성됐다. 이 어진을 받아 든 정조는 또다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이날 그는 어진을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하라고 명령한 뒤, 별도로 제작한 자신의 미니 초상화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이날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정조 15년 10월 7일 자 <정조실록>은 정조가 경모궁에 가서 참배했다고 기술한다. 그런 뒤에 정조가 경모궁 망묘루에 어진 소본(小本)을 보관했다고 알려준다. 종묘 망묘루뿐 아니라 이런 사당의 망묘루도 신성시됐던 것이다.
이처럼, 왕들의 위패를 안치한 정전뿐 아니라 그들의 휴식처인 망묘루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됐다. 왕조시대 사람들은 이런 공간들이 포함된 종묘를 훼손하는 행위를 죄악시했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이 모반대역죄로 처벌됐다. 종묘로 상징되는 국가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뿐 아니라 종묘라는 구체적 건물을 훼손하는 행위도 모반대역죄로 규율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경국대전> 형전과 더불어 형법 기능을 한 <대명률직해> 형률은 모반대역죄 편에서 "종묘·산릉 및 궁궐을 훼손하기로 모의"한 사람들을 주범·공범 가리지 않고 거열형에 처할 것을 규정했다. 종묘·왕릉·궁궐을 훼손하면 사지를 찢겠다고 예고했던 것이다. 그만큼 망묘루를 비롯한 종묘 내의 공간들이 신성시됐다.
김건희씨가 주관한 망묘루 차담회는 조선시대 군주들이 주관하던 이벤트다. 이런 의미를 모를 리 없는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그 같은 차담회를 연 것은 국정 개입을 일삼던 김씨의 '방자함'이 하늘을 찔렀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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