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10 10:55최종 업데이트 25.09.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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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알선수재) 등의 혐의를 받는 김건희(파면된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아내)씨가 8월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대기 장소인 서울남부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김건희 특검팀이 종묘 차담회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3일 종묘 내의 망묘루에서 외부인들과 차담회를 연 일이 수사 대상이 됐다.

그해 8월 23일, 이원석 검찰총장은 김건희 명품백 사건과 관련해 수사심의위원회를 소집했다. 9월 5일,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김건희 총선개입 특검법을 발의했다. 이렇게 김건희씨로 인한 국가적 논란이 컸던 시점에 그가 종묘에 들어가 월권적인 차담회를 여는 일이 있었다.


김씨는 국가유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 대통령실과 국가유산청까지 움직였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타고 종묘를 출입하고 망묘루에 냉장고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CCTV를 켜두어야 할 시간대에 꺼두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종묘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은 왕조의 신들로 격상된 역대 임금 부부의 위패를 안치한 정전이라는 건물이다. 이 정전의 동쪽에 망묘루가 있다. 종묘 정문인 외대문과 인접한 곳이다.

김건희씨는 종묘 정전을 바라보는 망묘루에서 사적인 차담회를 열었다. 이 사안은 종묘에 몰래 들어가 망묘루에서 차를 마셔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 부인이 그곳을 이용하고자 국가기관을 움직였다. 망묘루라는 공간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면, 이 같은 행동은 국가유산 침해나 권력남용과 별개로 그의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종묘 망묘루 안내판은 "망묘루는 임금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며 "망묘루라는 이름은 제향 시 임금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라는 설명을 제공한다.

종묘 망묘루 안내판.김종성

종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띠었다. 왕실 사당을 지칭하는 동시에 국가 자체를 상징했다. 왕조의 조상신들을 모신 곳이기에 국가 자체를 상징하는 의미도 띠게 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대화에서 자주 나오는 '종묘사직이 위태롭다'는 말은 국가적 차원의 위기를 지칭했다.

그래서 '망묘'는 왕실 사당을 바라본다는 의미뿐 아니라 '국가를 생각한다'는 의미도 함께 띠었다. 누구나 다 국가에 관해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종묘 망묘루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주였다. 망묘루에서 차를 마시며 국가를 걱정하는 모습은 군주의 모습이었다.

대통령 부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나라를 걱정할 수 있지만, 대통령 부인이 국가기관들의 협조를 받아 군주의 공간이었던 망묘루를 이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국정에 개입하는 대통령 부인이 하필이면 그 공간에 들어가 군주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연출했다. 김씨의 차담회는 그런 의미에서 오만한 이벤트다.

국민들로부터 공적 위임을 받은 일이 없는 김씨가 왕조시대 군주처럼 행동했다. 종묘에 몰래 들어가 차담을 했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국가기관들의 협조를 받아 그렇게 했다. 그래서 문제 있는 행위다.

망묘루 차담회는 조선 군주들이 주관하던 이벤트

서울 종묘 내의 망묘루.김종성

1793년 5월 16일, 서울에는 비가 많이 왔다. 이날, 정조 임금은 여름 제사의 제수용품들을 확인하고자 빗속을 뚫고 종묘로 행차했다. 이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정조 17년 4월 7일 자 <정조실록>은 "태묘로 나아가 하향(夏享)의 희생물과 그릇을 살펴보셨다"고 기술한다.

정조는 그날 밤을 망묘루에서 보냈다. 이처럼 망묘루는 군주가 휴식뿐 아니라 수면도 취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왕조시대에는 특히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기 때문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왕실 인장 그림을 거기에 보관했다. 영조 30년 12월 14일 자(1755.1.25.) <영조실록>은 "주상이 태묘에 소장된 금보도식(金寶圖式)을 가져다 보고 망묘루에 다시 봉안했다"고 알려준다. 종묘 망묘루가 금보도식의 보관처였던 것이다.

정조는 27세의 젊은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열 살 때 목격했다. 그 뒤 정조의 일생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험난한 투쟁의 길이었다. 정조의 개혁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것을 성취하는 과정이었고, 정조가 칼날을 겨눈 개혁 대상들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력이었다.

그처럼 아버지에 대한 한이 사무쳤던 정조가 지금의 서울대병원 마당에 세운 것이 경모궁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당인 이곳 내부의 망묘루에 애착을 보였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하고 그런 시를 걸어놓기도 했다.

1791년 11월 2일, 39세 된 정조의 초상화가 완성됐다. 이 어진을 받아 든 정조는 또다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이날 그는 어진을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하라고 명령한 뒤, 별도로 제작한 자신의 미니 초상화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이날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정조 15년 10월 7일 자 <정조실록>은 정조가 경모궁에 가서 참배했다고 기술한다. 그런 뒤에 정조가 경모궁 망묘루에 어진 소본(小本)을 보관했다고 알려준다. 종묘 망묘루뿐 아니라 이런 사당의 망묘루도 신성시됐던 것이다.

이처럼, 왕들의 위패를 안치한 정전뿐 아니라 그들의 휴식처인 망묘루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됐다. 왕조시대 사람들은 이런 공간들이 포함된 종묘를 훼손하는 행위를 죄악시했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이 모반대역죄로 처벌됐다. 종묘로 상징되는 국가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뿐 아니라 종묘라는 구체적 건물을 훼손하는 행위도 모반대역죄로 규율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경국대전> 형전과 더불어 형법 기능을 한 <대명률직해> 형률은 모반대역죄 편에서 "종묘·산릉 및 궁궐을 훼손하기로 모의"한 사람들을 주범·공범 가리지 않고 거열형에 처할 것을 규정했다. 종묘·왕릉·궁궐을 훼손하면 사지를 찢겠다고 예고했던 것이다. 그만큼 망묘루를 비롯한 종묘 내의 공간들이 신성시됐다.

김건희씨가 주관한 망묘루 차담회는 조선시대 군주들이 주관하던 이벤트다. 이런 의미를 모를 리 없는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그 같은 차담회를 연 것은 국정 개입을 일삼던 김씨의 '방자함'이 하늘을 찔렀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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