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영상 캡처]
연합뉴스
최고 기량의 한국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눈앞에서 직접 봤다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황, 경기장을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는데 앞 사람이 하는 대화가 들렸다.
"다음 주 내슈빌 경기(멕시코전)도 대단하겠다. 근데 거기 가려던 사람 중에 ICE(이민세관단속국)에 잡혀간 사람들도 있겠지?"
지난 4일 조지아주 엘러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LG 에너지솔루션 합작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이뤄진 불법 이민 단속 이야기다. 총 475명이 구금됐고 이 중 한국 국적자는 300여 명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두 번째 임기 중 단일 사업장 기준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단속으로, 지금 미 언론에서도 메인 뉴스다.
"그러네. 손흥민 본다고 나처럼 며칠 잠도 못 자고 좋아했을 텐데..."
오는 9일(현지시간) 멕시코 국가대표팀과의 친선경기가 열리는 테네시주 내슈빌은 그 건설 현장에서 차로 7시간 정도 떨어졌다. 대학 풋볼리그 결승전에 가기 위해 12시간 운전해 본 사람으로서, 이날 꽤 많은 이들이 차를 나눠 타고 경기가 열리는 지오디스 파크에 갈 계획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멕시코 국적의 히스패닉 노동자들도.
오늘 훌리건 같던 미국 응원단들의 행동이 불편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같은 세금을 내고 같은 법규를 지키며 동등하게 사는 이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쇠사슬에 묶여 단속되는 '인종 프로파일링'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호주 노동자에게만 주어지는 E-3 비자, 왜 우리는 안 되나
"B1 비자나 ESTA를 이용해 입국해 장기 근로를 했다면 불법 근로가 명백하다."
"한국 기업들이 단기 비자나 무비자 입국 제도를 노동에 활용한 것은 '꼼수'고 이는 한국 기업과 정치권의 안이한 한미 동맹 인식의 결과다."
공화당 극우 정치인을 비롯해, 일부 한인 신문들과 여러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한국 기업과 한국 정부에 돌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분석들이 옳은 걸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트럼프 행정부의 '모순된 정책'을 지적했다. 한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면서, 한편으로 이민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한국 기업들의 불안을 초래해 향후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썼다.
<블룸버그 통신>도 이번 단속이 트럼프가 치적으로 내세웠던 제조업 투자와 일자리 창출 사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AP통신> 역시 단기 비자로 들어온 숙련 기술자·엔지니어가 포함된 단속 대상자들이 미국 현지에서 부족한 기술을 설치·전수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단속으로 인해) 공장 건설 지연 및 생산 비용 증가와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조지아주 AFL-CIO(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노조회의)도 이번 단속이 '테러 분위기'를 조성해 노동자 착취를 용이하게 만든다고 비판했고, 미국이민협의회(American Immigration Coouncil)도 "노동자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키워 노동력 부족 심화와 경제 안정을 위협한다"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미 주요 언론과 노동단체 등은 지금 미 이민당국이 보여준 무모함과 야만성을 성토하고 있다. 쇠사슬 수갑에 놀라고 분노하는 미국인들과 함께, 더 나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당당히 한국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호주와 미국 간엔 FTA에 따라 오직 호주 국적자만 신청할 수 있는 취업 비자인 ' E-3 비자'가 있다. 전 세계 다 합쳐 8만 5000개밖에 되지 않는 외국인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 비자' 쿼터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게 아니다. 미국 고용률을 높여줄 공장을 짓는 한국 노동자들에겐, 미국 정부가 E-3 같은 특별 비자로 보호해 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대미 외교의 터닝포인트 되어야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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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와 무엇을 함께 협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절대 협상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중 '멕시코의 주권'은 협력 대상이 아닙니다."
지난 7월, 트럼프의 대멕시코 30% 관세 통보에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그 대신 마약 밀매 단속 강화 등 실질적 조치를 하며 미국과의 협상에 당당하게 임했던 셰인바움 대통령은, 멕시코를 비롯한 전 세계의 박수를 받았다(현재 멕시코는 관세 협상 시한을 90일 연장하며, 당분간 관세 인상을 막은 상황이다).
멕시코와 함께 북중미 축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주장은 크로아티아계이며, 네덜란드와 라이베리아 출신도 있고 독일 출신 클린스만의 아들도 뛰고 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실력 있는 선수들이 USA라는 이름하에 FIFA 랭킹 15위를 만들면서, 팬층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며,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했다.
미 이민당국에 의해 대규모 단속이 벌어진 다음 날,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전기차 배터리 공장 앞 도로 '제네시스 드라이브'에선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모여 피켓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들고 있던 팻말 속 문구들에 눈물이 났다.
"이민자는 미국의 적이 아니다."
"당신이 어느 나라에서 왔든 우리는 이웃이다."
포용력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매력으로 전 세계 인재들을 끌어모았던 미국, 그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기울어져 가는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분노와 기쁨이 교차한 요 며칠간, 이민자의 심경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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