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08 06:47최종 업데이트 25.09.08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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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일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미국 우주사령부 본부를 콜로라도주에서 앨라배마주로 이전하는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9월 3일, 매사추세츠 연방지방법원이 내린 판결은 단순한 1심 판결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하버드대학 연방연구비 22억 달러 동결 조치에 위헌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연방법원이 행정부의 주요 정책을 막아선 8번째 사례라는 사실이다.

LA 주방위군 투입, 의회 승인 없는 관세 부과, 출생시민권 제한, 이 모든 조치가 법원의 벽에 부딪혔다. 행정명령 발표와 법원의 기각, 이 사이클이 마치 예정된 각본처럼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트럼프 정부는 왜 실패가 예견된 위헌적 조치들을 계속 시도하는 걸까? 그리고 법원의 연이은 제동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트럼프의 독특한 성격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이는 나무만 보고 숲을 놓치는 일이다. 진짜 답은 개인의 성향을 넘어선 구조적 차원에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법부와 행정부의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1960년대 시민권 운동 이후 축적된 진보적 성과들을 대통령 권한을 극대화하여 해체하려는 보수 진영의 장기 전략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일행정부 이론: 보수의 50년 설계도

지난 4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트럼프 정부의 하버드 대학 간섭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는 모습.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의 위헌적 행보는 즉흥적 일탈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보수 법학계가 50년간 벼려온 권력 재편 청사진이 있다. 바로 '단일행정부 이론(Unitary Executive Theory)'이다.

이론의 논리는 단순하다. 헌법이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시했으니, 대통령이 행정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는 것. 모든 연방기관과 공무원은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아야 하고, 독립 규제기관이나 의회의 견제는 위헌이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의 뿌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전 패배와 워터게이트로 대통령권이 추락한 시기, 동시에 시민권 운동의 성과들이 제도화되던 때였다. 인종차별 철폐, 여성 권리 신장, 환경 규제 강화, 보수는 이 모든 진보적 변화를 '과도한 정부 개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역설적 해법을 제시했다. 더 강력한 대통령만이 이런 '좌파적' 정책들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는 것.

2001년의 9·11은 이론을 현실로 만드는 기회였다. 부시 정부는 국가안보를 앞세워 의회 동의 없는 감청, 무기한 구금, 해외 비밀 고문을 자행했다. 대통령 권한의 경계가 사실상 사라진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한 '프로젝트 2025'는 단일행정부 이론의 완결판이다. 900쪽에 달하는 이 문서는 취임 즉시 수십만 연방 공무원을 교체하고, 모든 독립기관을 대통령 직속으로 재편하는 로드맵을 담았다. 더 나아가 의회 장악과 헌법 개정까지 겨냥한 3단계 전략도 명시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다. 238년간 이어온 권력분산의 원칙과, 이를 허물려는 보수의 장기 프로젝트가 정면충돌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선집행 후소송, 시간을 무기로 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24일, 마린 원을 타고 리즈버그 공항에 도착한 모습.AP Photo/ 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가 법원의 연패에도 불구하고 위헌적 조치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선집행 후소송'이라는 계산된 전략에 있다. 먼저 집행하고 법적 책임은 나중에 감수하면서 정책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배구에서와 같은 일종의 '시간차 공격'이다. 행정부는 대통령 사인 한 번으로 명령을 내리지만, 사법부는 절차와 심리를 거쳐야 한다. 디지털 속도 대 아날로그 속도의 싸움에서 판결은 늘 한 박자 늦는다.

실제 행정명령 발표부터 법원 판결까지는 최소 4-8개월이 걸린다. 이 기간 동안 정책은 이미 현실을 바꾼다. 1심이나 2심 법원 판결 이후에도 곧바로 정책이 무효화되는 것도 아니다.

하버드 연구비 동결이 대표적이다. 4월에 22억 달러를 끊었고, 위헌 판결은 9월에 나왔다. 그 5개월 동안 연구는 중단됐고, 많은 연구팀이 해체됐다. 실제 400명 이상의 연구자가 직장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원이 "위헌"이라 선언해도 이미 벌어진 일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관세 폭탄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국가비상권을 근거로 전 세계에 일방적 관세를 부과했다. 항소법원이 "권한 남용"이라 판결했지만, 효력 정지는 10월까지 유예됐고 최종 판결은 내년에야 나온다. 그때까지 관세는 계속 징수되고, 무역 질서는 이미 재편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집행력의 비대칭이다. 법원 판결을 강제 집행할 연방보안관은 고작 3500명이다. 반면 대통령이 지휘하는 연방 공무원은 330만 명, 군대는 130만 명이다. 법원이 "중단하라"고 판결해도, 실제 집행은 행정부의 몫이다. 대통령이 버티면 법원이 강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의회가 탄핵을 해야 하지만 상원에서 3분의 2의 지지를 받는 것은 현재로선 기대난망인 일이다. 트럼프가 1기 정부에서 2번이나 하원에서 탄핵을 당하고서도 상원에서 부결됐었다. 물론 미국 역사상 상원까지 탄핵이 통과돼 물러난 대통령은 아직 없다.

게다가 최종 변수는 대법원이다. 6대 3 보수 우위, 그중 3명은 트럼프가 임명했다. 만약 대법원이 단일행정부 이론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하급심 판결들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더 나아가 권력집중을 정당화하는 판례가 축적될 수 있다.

따라서 법원의 연속 판결을 사법부의 승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가 소모적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신호다. '선집행 후소송'은 단순한 편법이나 트럼프 개인의 즉흥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헌법이 설계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자체를 우회하여 권력구조를 뒤바꾸려는 치밀한 보수 진영의 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트럼프와 보수 진영의 공생관계다. 보수는 50년간 준비한 권력 재편 이론을 트럼프를 통해 현실에서 실행한다. 트럼프는 보수가 제공하는 이론적 정당성과 '프로젝트 2025'라는 구체적 로드맵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활용한다. 이념과 야망이 만난 이 결합이야말로, 지금 미국 헌정 질서를 뒤흔드는 진짜 위협이다.

이제는 미국이 K-민주주의로부터 배워야 할 때

트럼프와 보수 진영이 실행 중인 '프로젝트 2025'는 단순한 정책 모음이 아니다. 대통령 권한을 영구화하기 위한 3단계 로드맵이다.

그들은 이미 1단계를 실행하고 있다. 트럼프는 행정명령으로 기정사실을 만들고, 법원이 뒤따라오게 한다. 위헌 판결이 나와도 상관없다. 현실은 이미 바뀌었고, 법원의 집행력에는 한계가 있다. 의회가 탄핵을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

2단계 목표는 2026년 중간선거다. 보수 진영은 의회 장악을 위해 15억 달러를 모금 중이다. 상하원을 차지하면 트럼프의 행정명령들을 법률로 굳히고, 헌법 3조를 활용해 법원의 심사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준비되어 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지금까지의 위헌 판결들은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3단계는 헌법 개정이다. 보수 법학자들은 이미 개정안 초안을 다듬고 있다. 1937년 루스벨트의 '법원 확대안'을 되살려 대법관을 13명, 15명으로 늘릴 계획도 세웠다. 보수 우위를 영구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2026년 중간선거가 분수령이다. 그들이 의회까지 손에 넣으면, 지금의 사법부 저항은 헛된 몸부림이 된다. 트럼프와 보수 진영은 매디슨의 견제와 균형을 해체하는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 중이다.

법원이 이미 8번 제동을 걸었지만, 이는 미국 사법부의 승리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 취약성을 보여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판결은 늦고, 집행력은 없으며, 2026년 이후엔 아예 무력화될 수도 있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내란 이후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되살렸다. 아직도 내란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지 않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미국이 우리의 민주주의 회복력에서 배워야 할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깨어있어야만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워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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