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04 15:22최종 업데이트 25.09.0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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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컷넷플릭스

*이 글에는 <애마>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주말 내내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를 봤다. 나는 1988년생이다. <애마>의 모티브가 된 영화 <애마부인>이 크게 흥행하던 그 시절을 겪은 적이 없다. 나에게 1980년대는 오로지 독재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관심을 무력화하기 위해 폈다는 전두환의 '3S(Sex, Sports, Screen) 정책'으로 표상되는 시절이다. <애마부인>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같은 해 개봉한 '3S'의 대표격 영화다.

그런데 40년의 세월이 지나 만들어진 <애마>를 보면서, 나는 '애마'가 단지 '당대의 충무로'를 꼬집은 영화라는 비평들에 의문을 품게 됐다. <애마>는 1980년대 독재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숨 쉬던 시절만 꼬집는가?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한 일들이 아닌가?

여전한 '젖가슴'의 세계에서

넷플릭스 6부작 <애마>는 <애마부인>의 무대인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심야영화가 개봉하던 전두환 정권 초창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정희란(이하늬)과 신인 배우 신주애(방효린)가 여성 배우에게 벗을 것을 강요하는 세상과 맞짱을 뜬다.

극은 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희란이 귀국길 비행기에서, '젖가슴' 범벅인 새 영화 <애마부인>의 시나리오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온다. 여자의 '젖가슴'으로 통용되는 세계는 오늘날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젖가슴'은 <애마부인>의 시나리오에서처럼 여체에 대한 직접적 노출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쓰이지만, 세상만사를 은유하는데 '젖가슴'이 등장하는 것을 두고 많은 여성들은 불만을 표출해 왔다. 2019년 출간된 소설 <언더 더 씨>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여성 고등학생이 자두를 일컬어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라는 비판이 일었고, 결국 저자와 출판사는 사과했다.

단순히 '젖가슴'이 등장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여성의 몸을 경유해 비유하는 일종의 작법과 화법에, "어느 여고생이 자기 가슴을 자두에 비유하냐"라는 비판처럼 해당 작품이 문학의 핍진성에서 한참을 벗어나 철저히 중년 남성의 시선으로 쓰였다는 게 문제다. 비슷한 일련의 재현을 두고 여성들은 '젖가슴 문학'이라 이름 붙였다.

그 연기는 '주체적 섹시'의 영역이었을까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컷넷플릭스

<애마부인>은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욕망을 재현한 여성영화인가, 아니면 '육감적인 가슴'을 앞세워 여성의 몸을 도구화한 에로영화인가. 드라마 <애마>는 실존하는 영화 <애마부인>을 다시 쓰고, 당대 여성들의 움직임을 새로 쓰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희란이 '애마부인'역을 마다하자 신성 영화사 사장 구중호(진선규)는 희란을 조연 에리카 역으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주연 역에 신인 배우를 발탁하기 위해 오디션을 연다. 이때 곽 감독(조현철)의 눈에 띈 이가 '밤무대 탭 댄서' 신주애다. 오디션에서 주애는 시원하게 가슴을 열어젖히며, 구중호의 눈에도 확실히 든다. 극 중 주애는 연기자의 길을 동경하는 신인 배우임과 동시에 자신이 가진 '풍만한 가슴'에 매겨진 물질적 가치를 알고 활용하려는 이다.

신인의 등장을 견제하는 희란 때문에 촬영은 순탄치가 않다. 희란과 주애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사이, 주애는 구중호에 의해 최고 권력자의 연회에 불려 갔다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희란과 마주한다. 촬영 현장에서 형성됐던 미묘한 갈등 구도는, 권력형 성착취에 노출된 선후배 여성 배우로서의 동병상련으로 전환된다.

이후 "기왕 찍을 거 잘해보자" 쪽으로 마음이 바뀐 희란의 입으로 듣는 영화 <애마부인>의 문제야말로, 여성들이 일련의 성애영화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란은 곽 감독에게 남성의 시각으로 재현된 여성의 과잉 성애화와 강간 판타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애마는 왜 그렇게 자위를 많이 하냐"라는 희란의 말에 곽 감독은 마시던 차를 뿜는데, 자기가 쓴 각본에 스스로가 민망해하는 바로 그 지점이 <애마부인>이 가진 아이러니를 그대로 표출한다.

영화의 주된 줄거리에도 문제가 있다. 각기 가정을 이룬 옛 연인이 있다. 남자는 여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여자를 강간하고, 이에 여자가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애마부인>의 주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강간 판타지를 재현한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전제돼 있다는 곽 감독의 말에 희란은 반박한다. "그래가지고 강제로 범해지길 바라는 여자 사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감독님."

그나마도 신인인 주애에게는 발언권이 없고, 10년간 정상 가도를 달린 '톱 배우' 희란이나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뽕>(1985)의 주연 배우 이미숙은 최근 유튜브 '짠한형'에 출연해 당시 여성 배우들이 처한 제작 환경에 대해 토로했다. "시나리오에서조차 노출 여부를 알 수 없었으며, 막상 촬영 현장에 가면 전라도 나오고 별 게 다 나왔다"는 얘기. 감독과 지난하게 다툰 끝에 '(노출신) 못 찍겠다'고 했더니 대역을 썼고, 힘들고 괴로워 울다시피 찍었다는 이야기.

영화는 희란의 의사가 반영된 곽 감독 편집본 대신, 구중호가 노출 위주로 잘라낸 편집본으로 극장에 내걸린다. 통행 금지가 해제된 새 시대의 첫 심야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애마부인>의 주인공 '애마' 역을 맡은 주애에게도 영화 속 연기는 '주체적 섹시'였을까. 영화를 보러온 친구들의 "부끄럽다"는 말 앞에서 눈물을 삼키는 주애의 모습에서, 그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다.

'썅년', '난년'이 되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컷넷플릭스

<애마>에서 '썅년'은 자기 욕망에 주체적인 여성상을 뜻한다. 희란과 주애가 스스로와 서로를 호명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반면 '미친년'은 세상의 틀에 갇히지 않는 여자를 향한 멸칭으로, 주로 구중호가 자신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희란과 주애를 두고 쓰는 말이다.

드라마는 여태껏 되풀이되는 '성녀와 창녀'라는 세상의 오랜 이분법도 보여준다. <애마부인>이 히트하자 주연인 주애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주애가 '시골 부엌데기' 출신이었다는 서사는 사람들 입맛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러나 이어 '밤 무대 탭 댄서'라는 폭로가 터지며 주애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아버지와 오빠들을 위해 살림하던 '부엌데기'처럼 가부장제에 봉사하는 '성녀'는 받아들여지지만, 밤무대에서 '다리를 벌렸을지도 모를' '창녀'는 사회적으로 용인 불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애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맞선다. 대종상 시상식에 밤무대 공연 당시 입었던 의상으로 '애마'(愛馬)에 담긴 속뜻처럼 말을 타고 등장한 것이다. 이를 본 희란이 말한다. "난년이네."

일련의 '썅년'들이 '난년'이 되는 순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성 영화사의 배우 지망생 황미나(이소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우울증에 따른 약물 중독. 그러나 실은 권력자들의 연회에서 마약을 강제로 흡입한 탓이었다. 애초에 <애마부인>이 '애마'(愛馬)가 음란하다는 검열 탓에 '麻(삼 마)'자로 변경한 '애마부인(愛麻婦人)'인 것처럼, 세상은 미나에게 '애마'(愛麻)의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고, 희란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드라마는 세상이 덧씌운 '말을 탄 음란한 여자'라는 뜻의 '애마'를, 말 타고 세상에 반역하는 여성으로서의 전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왜 이제야 애마부인을?"이라는 말들에 '애마'는 적극적으로 답하는 작품이다. '젖가슴'의 범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의 여성의 몸, '버닝썬' 사태를 연상케 하는 권력자들의 연회와 연예계 성착취는 오늘날도 여전한 문제이자,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로 더욱 극적으로 재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40여 년 건너서도 계속되는 이 착취의 사슬을 어찌할 것이냐고, '애마'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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