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자료사진.
연합=OGQ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있다.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두고 이 분야에서 유명한 연구자로부터 "내 연구와 너무 비슷하다"는 항의 메일을 받았다.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는지를 두고 벌어진 싸움을 생각하면, 그런 항의는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메일에는 그의 작업과 내 논문 사이에 어떤 점이 비슷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되어 있지 않았고,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상대는 내가 그의 기분까지 파악하여, 그가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하기 바랐던 걸까? 논문에서 어디가 비슷한지 정확하게 짚어 얘기했다면, 정말로 두 연구가 비슷한지를 놓고 학문적인 토론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조치를 취하기를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했다면, 그 조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가 모두 빠져 있었던 메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걱정만 가득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의 기분은 물론 중요하지만, 내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 병원이나 군대처럼 더 위계적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났으면 어땠을까? 기분과 효율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위계적 폭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직장과 일터에서 알잘딱깔센을 요구받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부하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는 일은 위계관계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센 폭력 중 하나이다. 이 다섯 글자가 인터넷에서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유명한 유튜버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잘딱깔센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알잘딱깔센' 다섯 글자는 일전 칼럼(
'끓는 물에 상추 데쳐 먹기'? 우리 집만의 문제일까요)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에 대한 지식이 사회가 아니 개인의 자기관리와 수양으로 수렴되는 아이러니를 지적했던 것처럼, 위계와 구조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잘 해 보자는 결론이 나와버리는 경로를 답습 중이다. 각자 알아서 '알잘딱깔센'을 더 잘 실천하는 직장인이 되기 위한 비법을 공유하는 슬픈 귀결 말이다.
기껏 위력을 문제 삼았는데 다시 약자가 알아서 잘해보자, 개인의 역량·성격 문제라니,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알잘딱깔센'이 넘치는 대학병원 환경 속에서, 전공의를 폭행하고도 슬그머니 돌아온 교수의 사례는 이 '슬픈 귀결'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숙하면 끝?…전공의 '소주병 폭행' 대학병원 교수 복귀 논란).
지난해 우리는 이 '알잘딱깔센'이 귀중한 목숨을 해치고, 커다란 부정의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하기도 했다(
임성근 "수색계속 명령 안했다…마침 여단장 옆에있어 의견제시"). 마침, 새 정권이 들어선 지금, 과거의 쌓인 부정의와 함께 일상에서의 개혁도 제안한다.
그 '개혁' 역시, 우리가 민주주의의 적을 몰아냈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바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과, 무심결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경계, 그리고 지향으로 함께하는 연대다. 한국 사회는 이미 촛불 광장에서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해 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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