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02 13:03최종 업데이트 25.09.0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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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8일 전달된 ‘대통령 지시사항'정보공개청구 누리집

2024년 7월 장마철을 앞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씨는 일선 기관에 "이번 장마에도 피해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는 짤막한 지시를 남겼다.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딱 한 줄 16글자를 담은 공문이 문화체육관광부, 충북교육청 등 여러 부처와 지자체의 각 행정복지센터에까지 내려보낸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짧은 내용의 지시지만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지시였다. 무엇보다 이 지시는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라는 인터넷 유행어를 떠오르게 한다. 지시를 받는 이가 구체적인 지침을 받지 않더라도 상대의 의중을 스스로 파악해서 지시한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면 좋겠다는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알잘딱깔센은 높은 위치에 있는 관리자가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서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시를 받는 입장에서는 업무의 청사진부터 짜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여기에 더해 지시를 내리는 사람의 의중을 추측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이 의중을 잘못 파악했다가는 질책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어도 큰 득이 없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대상을 뜻하는 고사성어 '계륵'(鷄肋, 닭갈비)의 유래는 알잘딱깔센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보여준다. 계륵은 <삼국지>에서 유래했는데, 한중을 정복하려던 조조가 계속하기도 어렵고 포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해서 '계륵'이라고 중얼거리던 것을 들은 신하 양수의 일화다.

양수는 조조의 마음을 읽고 철수 준비를 했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그 결말이다. 상사의 마음에 들지 않게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상사의 생각을 너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역시 문제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 직장에서 이런 일로 목이 날아가는 일이야 없겠지만, 많은 직장인이 양수가 겪었던 어려움에는 공감할 것이다.

알잘딱깔센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분명하지 않은 목표하에서 상사의 마음에 들 때까지 일을 반복해서 해야 하니 우선 비효율적이다. 이를테면, 발표 자료가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고치라고 하는 것이다. 관리자가 성과는 독차지하고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는데도 아주 효과적이다. 일이 잘 되면 일을 시킨 이의 유능 덕분이고, 잘 안되면 실무진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은 회사, 병원, 학교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그 해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알아서' 잘해주기 바라는 행태는 여러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 된다. '심기보좌'를 바라는 정치인이나 '갑질 상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절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이뤄지는 요구, 상대를 길들이며 행사하는 폭력은 젠더폭력과 위계폭력의 요체이기도 하다.

병원은 어떤가. 위계화된 의료계 환경 속에서, 권력과 소득을 보장받는 직군을 중심으로 노동과 구조가 짜여진다. 명백히 환자에게 해로운,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타 직군의 노동자가 이를 지적하고 고치기를 요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알잘딱깔센'의 권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환자의 안전도 위협한다.

일상에서의 개혁

직장. 자료사진.연합=OGQ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있다.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두고 이 분야에서 유명한 연구자로부터 "내 연구와 너무 비슷하다"는 항의 메일을 받았다.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는지를 두고 벌어진 싸움을 생각하면, 그런 항의는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메일에는 그의 작업과 내 논문 사이에 어떤 점이 비슷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되어 있지 않았고,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상대는 내가 그의 기분까지 파악하여, 그가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하기 바랐던 걸까? 논문에서 어디가 비슷한지 정확하게 짚어 얘기했다면, 정말로 두 연구가 비슷한지를 놓고 학문적인 토론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조치를 취하기를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했다면, 그 조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가 모두 빠져 있었던 메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걱정만 가득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의 기분은 물론 중요하지만, 내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 병원이나 군대처럼 더 위계적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났으면 어땠을까? 기분과 효율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위계적 폭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직장과 일터에서 알잘딱깔센을 요구받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부하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는 일은 위계관계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센 폭력 중 하나이다. 이 다섯 글자가 인터넷에서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유명한 유튜버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잘딱깔센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알잘딱깔센' 다섯 글자는 일전 칼럼('끓는 물에 상추 데쳐 먹기'? 우리 집만의 문제일까요)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에 대한 지식이 사회가 아니 개인의 자기관리와 수양으로 수렴되는 아이러니를 지적했던 것처럼, 위계와 구조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잘 해 보자는 결론이 나와버리는 경로를 답습 중이다. 각자 알아서 '알잘딱깔센'을 더 잘 실천하는 직장인이 되기 위한 비법을 공유하는 슬픈 귀결 말이다.

기껏 위력을 문제 삼았는데 다시 약자가 알아서 잘해보자, 개인의 역량·성격 문제라니,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알잘딱깔센'이 넘치는 대학병원 환경 속에서, 전공의를 폭행하고도 슬그머니 돌아온 교수의 사례는 이 '슬픈 귀결'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자숙하면 끝?…전공의 '소주병 폭행' 대학병원 교수 복귀 논란).

지난해 우리는 이 '알잘딱깔센'이 귀중한 목숨을 해치고, 커다란 부정의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하기도 했다(임성근 "수색계속 명령 안했다…마침 여단장 옆에있어 의견제시"). 마침, 새 정권이 들어선 지금, 과거의 쌓인 부정의와 함께 일상에서의 개혁도 제안한다.

그 '개혁' 역시, 우리가 민주주의의 적을 몰아냈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바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과, 무심결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경계, 그리고 지향으로 함께하는 연대다. 한국 사회는 이미 촛불 광장에서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해 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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