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2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사 '백주에 고관 규중(閨中)에서'
네이버
1910년에 수원에서 출생한 그는 경기고등보통학교와 중국 난양(남양)의학대학에서 수학한 뒤 1930년에 결성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항일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했다. 인간에 대한 압제를 거부하는 차원의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펼쳤던 것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한국현대필화사> 제1권은 "정화암·백정기 등 쟁쟁한 투사들 속에 바로 김광주도 등장한다"라며 "김광주의 항일활동은 선전물 배포와 작성, 친일분자 징치, 항일 연극운동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김광주는 1933년부터 <밤이 깊어갈 때>, <포도의 우울> 같은 단편도 발표했다. 그는 해방 뒤인 1948년에는 자신처럼 소설가가 될 아들 김훈을 얻는다.
새집다방으로 옮긴 처장 부인은 누구를 모델로 했느냐고 추궁한다. 김광주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명한다. 부인은 자기가 모델일 것이라고 확언한다. 김광주가 동의하지 않자, 부인은 자기 차에 동승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소설 속의 '나'처럼 김광주도 당국자 부인의 차에 타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부산시 서대신동의 공보처장 자택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안방으로 김광주를 불러들인 처장 부인은 "(주인공이) 나라고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으니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오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이 시점에는 그 부인이 자기가 소설 모델이 아님을 알게 됐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오해받기 싫다며 소설 취소를 요구했다. 정부 당국자도 아닌 당국자의 부인이 출판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김광주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처장 부부의 측근들에게 머리채가 잡히고 구둣발 구타를 당했다. 머리카락이 수없이 빠지고 다리에는 타박상이 생겼다. 또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사과문까지 작성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처장 부인 이씨가 일부 인사에게 오해당하는 그 점에 대하여만은 사과한다"는 내용이다. "오해"라는 표현이 담긴 사과문을 받아 든 처장 부인은 그를 풀어줬다. 자신이 소설 모델이 아님을 이 단계에서는 더욱 확실히 알게 됐던 모양이다.
이 사건에 대한 문인들의 분노는 즉각적이었다.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1926~1956) 등은 가만있지 않았다. 박인환·박목월·정비석·조지훈 등이 포함된 45인은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건 나흘 뒤에 발표된 이 성명서는 폭력 당사자 처벌뿐 아니라 전국 문화인에 대한 처장 부인의 서면 사과를 촉구했다. 전체 문인이 모욕을 당했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속한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위의 <한국현대필화사> 제1권은 "절대다수가 강경대응책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승만 지지파인 김광섭과 모윤숙의 활약으로 인해 김광주의 반성을 촉구하는 엉뚱한 성명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문인들의 일반적 분위기는 달랐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문인들의 분노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광주가 곤욕을 치른 다음 날, 공보처는 <나는 너를 싫어한다>가 실린 <자유세계> 창간호를 압수했다. 공보처장 이철원이 부인 편을 들었던 것이다.
<한국근대문학연구> 2019년 제20권 제2호에 실린 진선영 이화여대 교수의 논문 '폭로소설과 백주의 테러 – 1952년 <자유세계> 필화사건을 중심으로'는 "(공보처가) 부산에서 293권, 대구에서 307권의 <자유세계> 잡지를 압수하였다"라고 한 뒤 "<나는 너를 싫어한다> 전문을 파기한 채 홍문사로 돌려내보냈다"라고 말한다. 전쟁 와중에 공보처 직원들이 <자유세계>를 수거하느라 부산과 대구를 수색했던 것이다.
탄압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사건 6일 뒤에 보도된 그달 23일자 <동아일보> 2면에 따르면, 공보처장은 직원들을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 파견해 '사건을 보도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또 자기 명의의 공문을 각 언론사에 별도로 보내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공문에서 이철원은 "오해에 의하여 일시 감정적 충돌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는 말로써 자기 부인을 옹호했다. 부인이 오해를 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다. 대통령이 자신을 자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자기 부인이 허리를 숙이게 만드는 쪽으로 문제를 마무리하려 했을 것이다.
이철원은 1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난 1953년 3월 5일까지 재직하다가 중앙선거위원, 이승만 친위기구인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의 이사, 자유당 당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결격 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롯한 극우세력은 이승만 집권기를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적 시기로 치켜세운다. 바로 그 시절에 벌어진 게 김광주 필화사건이다. 정부 당국자뿐 아니라 당국자의 '사모님'까지도 표현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억압했던 '야만의 시대'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