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28 14:14ㅣ최종 업데이트 25.09.0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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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sijmen89 on Unsplash

현 정부가 국정과제를 통해 그리고 있는 '기본사회'의 청사진은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다만, 그 거대한 그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 자원을 어디에 가장 먼저 투입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세심함이 요구됩니다. 저는 그 핵심적인 첫걸음이 바로 의료급여에만 남아있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각지대의 얼굴: 수급자보다 더 나이 들고, 더 가난하고, 더 아프다

보건복지부 추산 비수급 빈곤층은 66만 명(2022년 기준)입니다. 복지패널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숫자도 충격적이지만, 더 아픈 건 이들의 상태입니다. 평균 연령 67세(수급자 61세), 연소득 약 1100만 원(수급자 1500만 원대), 집세·공과금 체납, 난방 중단, 굶음 경험률 모두 수급자보다 더 열악합니다. 비수급 빈곤층은 "빈곤하지만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사각지대라 부르지만, 이는 사실상 '복지 난민'과 다름없는 상태로, 그 실태를 더 아프게 드러냅니다.

의료급여의 역설: 선정기준은 더 높은데, 수급자는 적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기준은 생계급여가 기준중위소득의 32%, 의료급여가 40%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의료급여 수급자가 더 많아야 하지만 현실은 생계급여 169만 명, 의료급여 148만 명으로 반대입니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 이후 25년 가까이 의료급여 수급자 수는 사실상 제자리입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의료급여에만 유독 남아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입니다. 의료가 생존권이라면, 치료 접근성을 부양의무자의 존재 유무에 맡기는 제도는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발굴'의 딜레마: 찾아도, 해줄 것이 없다

정부는 AI로 위기가구를 발굴하겠다고 합니다. 빅데이터, 예측 알고리즘, 복지멤버십… 좋은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현장 실무자의 말은 다릅니다. "가장 어려운 건 스스로 나오지 않는 분들입니다." "발굴해도 도와줄 제도가 없습니다." "담당자 한 명이 수천 건을 떠안습니다."


서울연구원은 사각지대를 세 범주로 정리합니다. 첫째, 지원 경험이 있으나 충족되지 못한 '미충족 사각지대'. 둘째, 공공 접점은 있지만 지원 경험이 없는 '새로운 유형'. 셋째, 공공과의 접점 자체가 없는 '완전 사각지대'(전체의 약 30%). 여기에 접근의 장벽, 인력 부족·업무 과중, 개인정보 장벽, 컨트롤타워 부재, 민관협력의 취약성까지 겹칩니다. 냉정히 말해 지금의 발굴 시스템은 지도 위 빈칸을 찾아내는 '탐지기'는 되었지만, 제도 문턱을 낮추는 '열쇠'는 되지 못했습니다.

제도 개선이 먼저다: 문턱을 낮춰야 발굴이 통한다

사각지대 해소는 '발굴→연결'의 문제가 아니라 '선정기준과 문턱'의 문제입니다. 먼저 제도의 진입장벽을 낮춰야 발굴의 효율도 올라갑니다. 다른 기준을 합리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가 최우선 과제입니다. '부양비율 10%' 같은 미세 조정보다는 폐지 일정을 제4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2027~2029)에 명시하고, 예산을 선(先)배분해야 합니다. 의료는 생존의 전제입니다. '아파도 못 가는' 문턱을 먼저 허물어야 합니다.

정책 우선순위, 성과지표의 유혹을 이겨내자

2019년 근로장려금(EITC) 예산을 한꺼번에 3조 원 증액했을 때 전체 불평등은 줄었지만, 핵심 수혜는 하위 10~40%에 집중됐고 최하위층에는 혜택이 거의 닿지 않았습니다. 근로빈곤층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되, 같은 돈을 극빈층의 의료 접근성 보장에 투입했다면 생존 격차를 더 줄였을 것입니다. 정책은 결국 우선순위의 예술입니다. 예산은 당장 생명을 구하는 데 먼저 써야 합니다.

AI는 내비게이션, 사회 안전망은 에어백

복지와 돌봄에서 AI 활용은 반길 일입니다. 다만 AI는 길을 찾고 속도를 붙이는 '내비게이션'이고, 사람을 살리는 건 '에어백' 역할의 다층 사회안전망입니다. 발굴·상담·신청 간소화에 AI를 총동원하되, 예방적 안전망(빈곤 전락 방지)·치료적 안전망(긴급·의료·주거)·회복·자립 지원(자활·고용·교육)의 '세 겹 안전망'을 촘촘히 깔아야 합니다. 어느 한 겹에 구멍이 나면 그대로 바닥까지 떨어집니다.

거부하지만 위험한 사람들, 통합사례관리로 우회하자

현장에는 자포자기, 정신질환, 불신으로 지원을 거부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소득만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한 '넓은 의미의 돌봄'과 통합사례관리를 병행해야 합니다. 희망복지지원단의 역할을 강화하고, 지역사회 돌봄·정신건강 자원을 복지연결의 최전선에 같이 세워야 합니다.

위기의 첫걸음, '보편적 긴급지원'으로 막자

Give me your hand and I'll hol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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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의 감세 기조로 새 정부가 계획 중인 보편적 기본사회 정책을 한 번에 펼치기는 재정 여건상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긴급한 기본'부터 여는 건 어떨까요. 응급의료·긴급 돌봄·긴급복지지원에 기본 보장금액과 서비스 묶음을 정해 '선(先) 지원·후(後) 정산'을 원칙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광주다움 통합 돌봄의 '일정 금액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긴급 돌봄'은 좋은 선례입니다. 현행 긴급복지지원제도의 방식도 선 보호·후 정산이지만, 실제로는 감사·환수 부담 탓에 소극적 집행으로 골든타임을 놓칩니다. 대안으로 소득과 무관하게, 예를 들어 연간 100만 원 한도 내에서 화재·실직·주소득원 사망·긴급 돌봄 등 위기 시 즉시 지원받는 '보편적 긴급지원'을 시행합시다.

100만 원을 초과하는 더 큰 위기에는 현행 긴급복지지원제도나 다른 서비스로 자연스럽게 연계해 추가 지원을 받도록 설계하면 됩니다. 복잡한 심사와 사후 정산 부담을 줄여 행정 문턱을 낮추고, 지원의 신속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국가는 어떤 위기에서도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신뢰를 이렇게 쌓습니다. 이것이 '기본사회'로 가는 실질적 첫걸음일 될 수 있습니다.

컨트롤타워와 현장, 둘 다 단단해야 한다

사각지대 발굴의 한계 중 하나가 컨트롤타워의 부재였습니다. 각 주체가 상시 협의·조정할 컨트롤타워를 서둘러 구축하고, 지자체 전담조직과 인력을 계획적으로 확충해야 합니다. 동시에 현장에 쏟아지는 수천 건의 발굴 목록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인력·권한·정보 접근을 보강해야 합니다.

맺음말: 문턱을 넘어야 진짜 안전망이다

아무리 정교한 AI로 위기가구를 찾아내고 컨트롤타워를 세운다 해도, 정작 이들이 기댈 제도의 문턱이 높다면 안전망은 구호에 그칠 뿐입니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의 핵심은 '발굴' 이전에 '개방'입니다. 지금 당장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이 기댈 수 있도록,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라는 가장 높은 문턱부터 허무는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국민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국가의 최소한의 책무이자, 기본사회로 나아가는 진정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필자가 2025년 7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제3차 복지국가포럼(한국사회복지사협회 주관)에서 발표한 내용('새 정부에 제안하는 복지정책 최우선 과제')을 바탕으로 이후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허선
▲허선순천향대 교수포럼사의재

*필자소개: 허선은 순천향대학교 교수로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보건복지인재원장을 역임했다.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부터 시민사회까지 복지사각지대 해소와 국민권익향상을 위한 다양한 연구 및 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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