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전두환씨가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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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성명에서 전두환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했다. 재산 일부를 공개한 그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하면서 "이 재산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재산 헌납 선언도 정권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대국민 담화문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청와대에서 갑자기 또 다른 요구를 추가해왔다"라며 "청와대는 밀사를 보내 그이에게 '재산내역 공개'가 아닌 '전 재산 헌납'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유배형에 더해 재산 추징도 사실상의 형벌로 가해진 셈이다.
이순자 부부의 백담사행은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가 거세지는 속에서 일어났다. 전두환이 청와대를 나온 다음 달인 1988년 3월부터 국민들은 이들 일가족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 부부의 친인척인 이창석·전경환·전기환·전순환·전우환·홍순두·김영도·황흥식·김승웅 등을 구속으로 몰아넣은 국민들은 서울올림픽 폐막(10.2.) 직후부터 압박을 강화했다.
<노태우 회고록>은 "수많은 학생과 재야 인사들이 올림픽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희동에 있는 전 전 대통령 사저로 몰려가 화염병을 던지는 등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라며 "이들의 구호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구속하라'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노태우는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이 날 판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정이 그랬기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전두환뿐 아니라 이순자도 대중의 공격에 노출되거나 교도소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해외로 도망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과 맞닥트리는 대신에 받아들인 것이 백담사 유폐다. 그래서 이 유폐는 국민적 요구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긴 했어도, 사실상의 형벌로 볼 수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구체적인 유폐 장소를 결정한 쪽은 전두환과 참모진이다. 이들이 그 장소를 선정한 것은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노태우 회고록>은 장소가 정해진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오대산 월정사 등 몇 곳의 사찰을 검토했으나, 이왕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는 외지고 험준한 곳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고 언급한다.
백담사는 38도선 이북에 있다. 북위 38.165322가 되는 곳이다. 이순자 자서전은 "국토분단의 상징 같은 38선 표지판을 지나고도 차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한참을 더 달렸다"라며 "산사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로부터 다시 수십 리 외길이 험난한 절벽을 배경으로 끝없이 뻗어 있었다"고 묘사한다.
1988년 11월 23일 오전 10시에 연희동을 나선 전두환 이순자 부부가 백담사 도착 직후 맞닥트린 것은 강추위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은 "백담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20분이었다"고 한 뒤 "산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라며 "낯선 그곳에는 이미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겨울이 찾아와 있었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한낮 온도가 영하 20도인 그날, 이 부부가 그날 밤부터 자야 할 공간은 추위에 취약한 방이었다. 이순자 자서전은 "절에서 우리에게 내어준 두 평 남짓의 작은 골방은 덧문도 없었다"라며 "내설악의 바람에 삭아 낙엽색이 된 창호지문 두 개가 그 옹색한 방 앞뒤로 달랑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분노케 하는 일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에서 전두환 이순자 부부가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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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이 부부도 사전에 동의한 것이고 노태우 정권도 미리 파악해 둔 것이었다. <노태우 회고록>은 "보고에 따르면 그들 내외가 기거할 백담사는 설악산의 중허리에 위치해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전깃불은 물론 화장실·목욕실도 없는 아주 초라한 곳이라고 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관계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최소한의 불편은 덜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관계자들은 '불편을 덜기 위해 보수공사를 하면 기자들이 편하게 지낸다, 화려하다 등의 기사를 써댈 텐데, 그러면 국민감정을 좋지 않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조금도 손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겠다는 것이 그분들의 뜻'이라고 했다."
이순자 자서전에 따르면, 이 부부가 화장실로 사용한 곳은 나무판자들을 적당히 엮어 테두리를 만든 것이었다. 사찰에 화장실도 없다는 보고가 노태우에게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이순자 자서전에는 백담사 생활을 유폐·유배·귀양·형벌 등으로 표현한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 정도로는 씻길 수 없는 커다란 죄악을 지은 그들이지만, 적어도 그들 입장에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백담사 유폐가 사실상의 형벌이라는 이 부부의 인식은 훗날 전두환 재판에도 반영됐다. 전두환은 2년여 간의 유폐 기간을 형벌 산정 때 고려해달라고 재판부에 탄원했다.
전두환 1심 선고 결과를 보도한 1996년 8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백담사 유배도 법률상 형량을 감경할 만한 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재판부는 밝혔다"고 전했다. 서울지방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 탄원은 백담사 유폐가 그 부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준다.
지금 김건희가 처한 상황은 공식상으로는 '전직 대통령 부인 최초'이지만, 비공식적인 사례까지 감안하면 최초라고 보기 힘들다. 이순자의 백담사 유폐가 김건희의 구치소 생활보다 더 열악한 조건이었을 수 있다. 수감된 김건희가 이런저런 건강상 이유를 들어 수사와 재판을 지연시키는 것은 세상을 분노케 하는 일이다. 자신과 남편이 세상에 끼친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인식해야 한다.
이순자는 자기 나름대로 백담사에서 고생했다고 생각했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부부가 백담사 유폐 뒤에도 계속 세상의 지탄을 받은 것은 그 정도로 씻길 죄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건희도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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