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22 06:57최종 업데이트 25.08.22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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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일, 가족과 함께 나눈 식탁여운규

"간단히 국수나 삶아 먹자"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국수라는 음식이 먹는 사람에게는 간단한 한 끼일지 몰라도 만드는 사람에겐 꽤 힘든 노동이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의 잔치국수는 정말 맛있지만 제대로 해 먹자면 손이 참 많이 간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면은 따로 삶아야 한다. 양념장도 만들어야 하고, 고명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그저 김치나 좀 다져 올리고 김가루 정도 뿌린다고 해도 나름 성가실 텐데, 애호박볶음에 달걀 지단까지 생각한다면 이제는 정말 큰 일이 된다. 그야말로 만드는 데 한 시간, 먹는 데는 10분이면 되는 음식이 바로 국수다. 그러니 한 그릇이라도 직접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다.

내 손으로 국수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건 대략 10여 년 전의 일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요리하는 아빠, 멋지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말 한두 끼 정도는 내가 책임지고 싶었지만 라면 아니면 김치볶음밥 정도만 할 수 있던 그때, 겨우 생각해 낸 것이 국수였다. 늘 먹는 라면보다는 국수가 낫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에다 자취 시절 몇 번 흉내 내 본 잔치국수의 기억을 덧붙여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던 거다.

스파게티를 만들어 보자

그러나 나의 원대한 국수 만들기 계획은 물을 올리기도 전에 레시피 검색 단계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위에 쓴 것처럼 국수 고명을 올리자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의 나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칼질을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고명과 양념장을 만들 때 칼로 뭔가를 썰어야 할 일이 제법 많았다.

나 혼자 먹을 거라면 뭘 자꾸 썰고 다지고 하는 것들은 과감히 패스하고 초간단 모드의 국수를 말아낼 수도 있겠지만, 온 가족이 함께 나눌 음식이라 생각하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안 되겠는데, 뭐 다른 거 없을까. 칼질이 거의 필요 없으면서도 맛도 좋고 또 겉보기도 그럴듯한 음식은 과연 없는 걸까.

그때 생각난 것이 가끔 이탈리안 식당에서 먹었던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였다. 물론 스파게티도 시판 토마토소스를 사서 면만 삶아 섞어 먹으면 될 일이긴 했지만 그건 요리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썰기도 못하면서) 요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알리오 올리오는 신이 내린 음식처럼 보였다. 이건 정말 무슨 재료가 많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고, 칼질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분명했다.

마늘 몇 개 편썰기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뭣보다도 스파게티라니. 정말 폼 나지 않은가 말이다. 순간 내 눈앞에는 아빠가 근사하게 만들어 준 스파게티 접시를 앞에 두고 '와아~'하고 박수를 치는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제부터 일요일에는 내가 스파게티 요리사다. 짜장라면은 저 멀리 가라.

검색해 보니 만드는 방법도 엄청 간단했다. 아니 간단해 보였다. 이렇게 간단한 음식을 레스토랑에서는 그렇게 비싸게 받는단 말이지. 나는 도전해 보기로 했다. 대충의 레시피는 아래와 같았다.

[매우 간단해 보이는 알리오 올리오 레시피]
- 끓는 물에 소금을 한 줌 넣고 스파게티 면을 포장지에 표시된 시간만큼 삶는다.
- 차가운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편썰기한 마늘과 페페론치노를 넣어서 볶는다.
- 재료를 볶은 팬에 면 삶은 물을 좀 섞으면 그게 소스가 된다.
- 삶아낸 면을 소스에 넣어 잘 섞는다. 그 과정에서 면수를 좀 더 추가한다.
- 섞어낸 면을 접시에 담고 다진 파슬리를 뿌려 내면 된다.

처참한 실패의 추억

처음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실패작 중 하나. 뭔가 어설퍼 보이고 맛도 별로다.여운규

그러나 나의 첫 시도는 대실패로 마무리됐다.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면이 너무 뻑뻑해서 삼킬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소스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마늘 냄새가 조금 나는, 윤기라고는 전혀 없는 국수 덩어리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박수갈채 같은 건 꿈도 못 꿀 상황이었고 가족들은 처음 보는 괴식의 등장에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 음식을 결국 다 먹어냈는지, 아님 갖다 버리고 라면을 끓였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하여간 처참한 실패였다. 아아, 이게 아닌데. 나는 분명히 시키는 대로 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였을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애초에 올리브 오일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파게티라는 음식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저 삶아낸 국수를 기름에 한 번 더 볶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러니 집에서 식용유 조금 두르고 하는 볶음 요리의 개념으로 접근했고, 심지어 기름을 너무 쓰면 느끼하고 건강에도 좋지 않을 테니 최소한으로 사용하자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는 제대로 된 스파게티가 나올 리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겠다면서 오일을 쓰지 않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넉넉히 들어간 올리브 오일이 마늘의 맛과 향을 머금은 상태에서 면수와 만나 걸쭉하고도 은은하게 유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 당시의 내가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스에 약간 덜 삶은 듯한 면을 넣고 계속 치대듯이 흔들어 주면서 면수와 오일을 조금씩 첨가해 나가면 그제서야 소스와 면이 한 몸이 된 스파게티가 완성되는 거였다.

그러자면 면을 봉투에 표시된 시간보다는 1~2분 정도 덜 삶아 건진 다음, 소스가 담긴 팬에 넣고 약한 불로 더 조리해야 된다. 소스가 너무 질퍽할 필요는 없지만 스파게티 면이 소스를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너무 박하게 잡아도 안 된다. 접시에 국물이 흥건하지 않되 뻑뻑하지는 않도록 만드는 것이 요령이었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몇 번의 실패를 거친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그래도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알리오 올리오는 결코 만만하거나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까짓거 짜파게티랑 뭐가 많이 다르겠냐며 덤볐던 건 나의 오만이었다. 재료가 많이 필요하거나 복잡한 음식이 아닌 것은 사실이라서 이탈리아에서는 알리오 올리오를 일러 '아빠들의 파스타'라고 부른다고 했다.

평소 요리를 잘 하지 않는 아빠들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건 그 나라 얘기였고, 역시 우리에겐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란 음식이 아니었던지라 감각을 익히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취미생활이 되다

틈날 때마다 다양한 재료로 파스타를 만드는 취미가 생겼다.여운규

그렇게 어느 정도 감을 잡고 난 다음부터 나는 파스타 만드는 걸 무엇보다 즐기게 되었다. 출발은 단순한 알리오 올리오였지만 파스타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오일 파스타에 버섯이나 토마토 등 재료를 바꿔 넣는 단계를 지나자 계란과 베이컨을 써서 정통 카르보나라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치즈와 크림을 잔뜩 넣은 펜네 파스타에 날치알을 섞거나 전복 내장을 갈아 넣기도 했다.

다음에는 어떤 재료를 넣어서 어떻게 만들어 볼까? 스파게티 말고도 다양한 파스타가 있던데 어떻게 생긴 면이 어떤 재료랑 가장 잘 맞을까? 나는 틈날 때마다 이태리 국수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주말은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프라이팬을 돌려대는 아빠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나중에는 파스타를 약간 질려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실패작은 나왔고, 그걸 버리기도 아까우니까 또 먹어 치워야 하는 것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다만 아들녀석만은 아빠가 아무리 이상한 걸 만들어내도 맛있다며 묵묵히 먹어줬다. 큰 힘이 됐다.

그뿐인가. 간혹 내 맘에 드는 작품(?)이 나왔다고 한들 그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스파게티 맛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며, 하물며 내가 아무리 애를 쓴들 각종 재료가 골고루 들어간 시판 소스의 맛보다도 못한 것은 뻔한 일 아닌가.

"어디 보자, 점심 메뉴도 마땅치 않은데 파스타라도 삶을까?"라는 말에 "뭐! 또 스파게티라고?"라며 질색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역시 박수와 환호성은 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어허, 행복한 줄을 알아야지! 이거 밖에서 사 먹으려면 얼마나 비싼 건 줄 알기나 해?"하고 너스레를 떤다. 레스토랑 파스타가 훨씬 더 맛있다는 사실은 그럴 때는 말하면 안 된다.

가족의 힘은 함께 하는 밥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가 가장 소중하다.여운규

맨 처음, 아무도 못 먹을 맛의 밀가루 덩어리를 알리오 올리오랍시고 내놓았던 그때 이후로 약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파스타는 내게 본격적으로 음식 만드는 취미를 갖게 해 준 고마운 요리가 되었다. 그 못하던 칼질도 아직 미숙하긴 하지만 좀 늘었고, 파스타 말고 다른 음식도 만들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무엇보다 방학 때 집에 놀러 온 딸의 친구들에게 아빠가 직접 만든 봉골레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대접했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 약간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면을 좀 오래 삶아서 알 덴테의 식감을 살리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후회스럽긴 하다.

그 무섭던 코로나 시국, 바깥출입을 하기 힘들었을 때도 우리 가족은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건강과 안전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배달 음식도 많고, 인스턴트나 밀키트도 너무 맛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자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냉장고 털어서 대충 지어낸 스파게티라도 손수 만들어 가족과 나누는 일은 또 그 나름의 가치가 분명히 있을 터이다. 누군가 "오늘 간단하게 국수라도 삶아 먹을까?"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역시 국수는 이태리 국수가 간단하지!"

까짓거, 20분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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