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일 서울 세종로청사에서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창렬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IMF 긴급자금지원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게다가 97세대의 중심을 강타한 1997년 말 외환위기는 늘어난 대학생들이 86세대처럼 사회적 예비 엘리트라는 특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정리해고와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대학생'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나날이 추락했다. 기업과 사회는 대학생의 변별력을 확인하기 위해 대학 서열화를 부추겼고, 고립과 분투의 생존경쟁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97세대는 이런 사회 변화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진보적 세계관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세계관을 바꿀 성공의 기회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의 거대한 구조 변화와 집단적 세계관의 쇠퇴가 교차하는 국면에서 나타난 매우 예외적인 경험이었다. 세상을 해석하는 문화적 틀이 사라졌을 때, 최소한 정치적 성향의 측면에서 하나의 연령 집단은 더 이상 동질적일 수 없다. 그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다.
20대 보수화? 20년 된 이야기
이런 집단적 문화가 해체된 후, 청년 세대 정치의식의 변화가 감지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인 2007년 대선이다. 당시 방송사 대선 투표 출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42.5%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고,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20.7%만 지지했다.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원조 보수 이회창 후보에 대한 20대 지지율도 15.7%에 달했다.
20대의 보수후보(이명박, 이회창) 지지율 합산은 58.2%였다. 이번 대선 출구 조사에서 김문수 후보(30.9%)와 이준석 후보(24.3%)의 지지율을 합친 55.2%보다 높았다. 반면, 97세대가 끼어 있는 30대는 이명박 후보의 연령별 지지율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고(40.4%), 정동영 후보(28.3%)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6.1%)를 가장 많이 지지한 세대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외적이었던 97세대의 정치 성향을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의 청년을 평가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에서도 20대는 동네북이 됐다. 10대 여중·고생이 주도한 촛불시위를 두고 언론은 "동생들은 촛불 드는데 대학생은 연예인에 쌍수 들어"(<노컷뉴스> 2008.5.17.), "그 많던 20대 광장 세대는 어디로 갔나?", "촛불집회 10대에 자리 내주고 '골방'", "집회 참여가 경력 되나, 취업이 최우선", "광장 나가도 변화는 게 없더라 냉소도"(<한겨레> 2008.5.19.) 같은 기사를 쏟아 냈다.
당시 촛불시위에 20대나 대학생이 다른 세대나 직군에 비해 적게 참여한 것은 결코 아니다. 5월 2일부터 9월 9월까지 촛불시위 관련 연행자 1423명 중, 연령층으로는 20대가 가장 많은 546명이었고, 직업별로도 대학생이 337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예외적이었던 X세대의 정치 성향에 대한 고정관념은 청년을 둘러싼 환경과 구조가 모두 급격히 바뀌어 버린 현실을 망각한 채, 과거의 기준에 비춰 현실을 진단했다.
아주 길고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 소위 MZ세대는, 그런 의미에서 마치 신인류가 등장한 듯, 궁금증의 대상이 됐다. 2000년대 초반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20대의 정치 성향은 전체 여론조사 평균의 추이 변화에 거의 동조화한다. 세대 독립적인 의사를 형성하기보다 전체 여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20대 남성의 '상대적' 보수성과 20대 여성의 상대적 진보성 역시 20년 전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새롭게 등장한 청년 세대에 관한 각종 정치의식 조사는 이들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거나 일관된 패턴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조는 싫지만 나는 꼭 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식의 모순된 응답도 보인다. 그럼에도 이 세대에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가치는 '개인적 권리'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이는 2000년대 이후의 청년 세대가 이른바 '민주화'의 영향을 가장 제대로 받은 세대이자, 소위 '민주 정부'가 열심히 구현해 낸 '전 사회의 신자유주의화'를 가장 충실히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비교적 체계적인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시대 모순의 뿌리를 분단과 반공 독재, 왜곡된 경제 시스템 등 먼 역사와 구조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면,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의 시대는 민주당 정부가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민주당 정부, 그리고 이미 기득권의 위치에 있는 86세대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이다. 지금 청년에게 1987년 민주화를 말하는 것은, 1987년의 청년에게 한국전쟁을 말하는 것과 같이 먼 이야기다.
시시각각 변화한 청년의 이미지... 세대론은 정치투쟁의 결과

▲2013년 12월 14일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는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가 주목을 받은 가운데 서울 성북구 고려대 정경대 후문길 담벼락에 대자보들이 줄지어 붙어 있다.
이희훈
이제, 단일한 세대는 없다. 어떤 이들은 각자도생과 고립, 경쟁과 분투를 촉발하는 사회 구조의 개혁을 요구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그 분투와 경쟁 과정의 공정함과 결과에 따른 차별을 요구할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는 당면한 고통의 원인을 반공과 반중, 분단 체제에 기대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찾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외치면서, 자기 실속만 차리는 이율배반적인 위선자에게 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청년 세대는 하나의 특성과 성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청년 세대 내부에는 여러 세계관과 해석의 방식이 끊임없이 각축하고 있다. 어느 목소리가 크게 울리냐에 따라, 청년을 보는 세상의 시선도 시시각각 변해왔다. 20대 보수화를 욕하다가도,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나 '나는 대학을 포기한다'는 선언에 지지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집단으로서의 청년은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고, 필요와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 취사선택 되었다.
따라서 내란 이후 크게 이슈가 된 20대 남성 극우를 20대 남성 세대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도가 어떻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치 20대 남성의 지배적 특성인 것처럼 수용되면, 그래서 이런 논리와 사고가 20대 남성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런 감성이 정말 이 세대를 대표하게 된다. 복잡하고 모호하며 설명과 표현이 어려운 막연한 불만은, 목소리가 큰 누군가의 주장과 언어를 타고 표출되기 쉽다.
그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20대의 정치 성향은 조금씩 여론조사 전체 평균과 탈동조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일시적일 수는 있지만 문화적 토대도 다지고 있다. 그래서 세대론은 가장 정치적인 문제이며, 정치투쟁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비록 세대론이 허구일지라도, 가장 목소리가 크고, 동년배들에게 세상을 해석할 논리와 언어를 제공해 주는 집단이 마치 그 세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다시 동년배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20대 남성 극우를 비판하거나 비난한다고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극우 이외의 다른 목소리도 20대 남성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드러내고, 불만을 해석할 대안의 언어와 논리를 보여줘야 한다. 세대 내부는 하나의 경향이 아니라 여러 경향이 각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청년들이 어디 있냐고? 우리의 시선이 취사선택했을 뿐, 20대 보수화 담론이나 20대 개새끼론이 등장했을 때도 그런 청년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