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 행진에 개신교 차량이 "사랑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쓰인 글귀를 내걸고 참여했다.
고정희
CSD에 독일 연방 의사당에 무지개 깃발을 게양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2022년부터 걸렸기 때문에 올해도 당연히 깃발이 나부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율리아 클뢰크너 독일 연방의회 의장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5월 17일 세계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에 무지개 깃발을 게양한 바 있는 그녀는 이를 '유일한 공식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의회의 상징적 지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만큼 의장의 결정에 시민단체, 언론, 야당 등에서 실망이 컸다. 상징적 연대 부족과 보수적 태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시민들은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선 사람들에게 중립성 운운할 수 있을까", "중립적 차별도 있나" 또는 "깃발 내걸었다고 누구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연방의회 직원들의 공식적인 참여를 금한다고 발표해 당내에서도 비판받았다. 그녀는 "모든 중요한 사회적 이슈마다 깃발을 내걸 수는 없다"라며 독일 국기의 흑색, 적색, 황금색이 이미 자유, 평등, 다양성 등 모든 기본 가치와 소수자 권리를 포괄한다고 해명했다. 또한 "상징이 난립하면 오히려 상징성이 약해진다"라고 덧붙였다. 깃발 게양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의장의 권한이 분명하지만 거기서 멈추는 게 좋았다. 상징성에 관한 판단은 의장의 과제가 아닌데 불필요한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클뢰크너 의장은 종교와도 충돌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천주교 신학, 교육학, 정치학을 전공했고 독실한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교회와의 충돌은 의외였다. 본인의 신앙과 교회라는 기관 사이에 확실한 선을 긋는 듯하다. 교회가 현안에 간섭하며 정치 사회적 토론에 끼어들기보다는 본연의 역할, 즉 영적인 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클뢰크너 의장은 독일 천주교, 개신교와 모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양쪽에서 매일이다시피 비판의 소리를 내는 중이다. 중세부터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며 의무라고 믿고 있는데 그 자부심에 커다란 생채기를 낸 것이다. 참견할 것을 참견해야지 연방 의장이 감히 종교의 역할을 정의하느냐 되받아쳤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엄숙하게 지내기보다는 이쪽저쪽에서 충돌하고 있는 클뢰크너 의장은 아직 직무 파악이 안 돼서 그런 것일까? 그녀의 정치 경험으로 보아 그걸 모를 리 없는데 행보가 의아하기만 하다. 여성단체와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물론 여성의 사회 진출과 정치참여를 중요시하지만, '전통적 가족관과 보수적 가치' 내에서 추진할 것을 주장한다. 즉, 낙태, 동성 결혼과 동성 입양에 반대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2017년부터 합법화된 동성 결혼까지 반대하는 것은 분명 문제 삼을 수 있다.
혹시 의도적인 것은 아닐까? 의회에서 점잖게 의장 자리를 지키고 있기보다는 여론의 중심에 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스캔들 발언처럼 효율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욕을 먹으면서도 늘 환하게 웃는 것일까? 다음 선거에 총리직을 겨냥하거나 아니면 독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고 있을까? 그녀의 야망으로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현재 연방 의장은 대통령 다음으로 국가 의전 서열 2위이다.
미디어 정치가 시작되었다더니

▲7월 10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 회의에서 율리아 클뢰크너 독일 연방의회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율리아 클뢰크너는 지난 3월 25일 독일 연방의장에 당선되었다. 1972년생이니 비교적 젊은 편인데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 보수 성향이 뚜렷하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 진보성향의 총리와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하더니 결국 농업부 장관직을 따냈다. 당내 정치력이 뛰어나다.
금발 머리에 우람한 체격이라 게르만 신화의 브륀힐드 혹은 발키리를 연상시킨다. 메르켈 전 총리도 큰 편인데 둘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면 두 뼘은 더 큰 것 같다. 게다가 아무거나 걸치고 다니는 다른 독일 여성들과 달리 늘 화려한 정장 내지는 꼭 끼는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멋쟁이다. 외모만으로 본다면 매우 여성적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갑옷일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듯 도발과 공격에 서슴없다.
무지개 깃발 거부 건으로 인터뷰하던 중 "지금 세계적으로 박해받는 가장 큰 집단은 기독교도들이다. 그렇다면 한 해에 한 번씩 교황청 깃발도 올릴까?"라고 한 것 때문에 또다시 여론이 끓어올랐다. '왜 하필 교황청이냐, 종교와 성소수자를 서로 비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종교는 선택이지만 성소수자는 선택이 아니다', '기독교도들이 가장 크게 박해받는다는 근거는 또 어디에 있나' 등등.

▲7월 2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 행진에서 시민들이 "우리의 사랑은 너희들의 증오보다 강하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고정희
흥미롭게도 기독교 단체에서 - 천주교와 개신교 둘 다 - 기독교가 가장 많이 박해받고 있다는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구 전체에서 종교로 인해 쫓고 쫓기고, 죽고 죽이는 끔찍한 비극이 횡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기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모든 종교에 해당한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와 교황청만 언급한 것은 편협하며 포퓰리즘을 의심하게 한다고 비난했다.
천주교 신문에서는 누가 되었든, 소수, 다수를 막론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울 방안을 내놓아야 하거늘 누가 더 쫓기는지 서로 비교함으로써 오히려 집단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미운털이 박힌 터라 의장이 뭐라고 해도 반대쪽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국제인권협회 독일지부까지 나섰다. 종종 인용되는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의 약 80%가 기독교도"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이 수치가 계속 인용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인 것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
성소수자들은 그들의 자존감을 보이기 위해 행진을 한 것에 불과한데 파장이 커지고 있다. 종교인 간의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긴 역사 속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었다가 다시 뒤집히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해 왔다. 이념도 마찬가지다.
반면 성소수자들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오랫동안 핍박받아 왔지만, 가해자였던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높지 않다. 게이들이 레즈비언들을 공격했다거나 혹은 그 반대였다거나 하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연방 의장과 교회 사이의 알력 다툼에 빌미로 이용되고 있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격이다.
율리아 클뢰크너 의장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열심히 담고 있다. 꼭 어느 여왕의 인스타그램 같다. 아닌 게 아니라 20대엔 와인퀸으로 선발되기도 했단다. 한 정치 평론가가 말하기를 이제 정당 정치는 서서히 무너지고 미디어 정치가 시작되었다더니 맞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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