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06 15:29최종 업데이트 25.08.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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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안학섭씨가 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송환 촉구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42년 4개월간 비전향장기수로 구금됐다가 1995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안학섭은 자신을 이북으로 송환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95세인 그는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며 "감옥에서 생사를 함께한 동지들이 묻힌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 내 희망"이라고 호소한다.

이적 민통선평화교회 목사와 한명희 전 민중민주당 대표가 공동단장인 안학섭선생송환추진단도 송환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송환추진단은 지난 2일에도 안학섭과 함께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였다.

지난 4일 보도에 따르면, 통일부 관계자들이 7월 23일 그를 방문해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송환 요구의 배경 및 내용 등을 파악했다. 6·15남북정상회담 3개월 뒤인 2000년 9월에도 비전향장기수 송환이 있었다. 당시 그는 "미군이 나갈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잔류했다. 통일부 관계자들은 그의 입장이 바뀐 이유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김정은 정권이 통일정책을 폐기하고 2국가 체제를 천명하고 있어, 이재명 정부가 송환한다 해도 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다. 그렇지만 명분 없이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북이 수용한다면 남북관계에 다소나마 훈풍이 불 수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배경 따져봐야

1930년에 강화군 하점면에서 태어난 안학섭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했다가 붙들렸다.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제네바협약에 따라 포로로 대우받고 석방돼야 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를 포함한 전쟁포로들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다. 그 후의 반공정권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 강화지회 및 전교조 강화지회가 작년 12월 6일 발행한 <강화시선> 제16호에 실린 구술록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그의 구술을 기초로 강신천 <강화시선> 편집위원이 집필한 '고향에서 살다 죽고 싶어요'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 인민군 정복을 입고 당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전쟁포로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고 간첩으로 몰아 40년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반공정권들은 전향하면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반공정권들은 다음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들을 저질렀다.

"신청인 안학섭 등 23명은 각각 대전·대구·광주·전주 교도소 및 청주보안감호소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년 동안 독방생활, 운동시간 및 치료의 제한 등 비인도적 처우를 받는 동시에 교도관들로부터 구타 당하는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나아가 교도소 측이 동원한 폭력 재소자들로부터도 전향 강요를 받으면서 고문과 구타 등을 당했다며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반공정권은 조폭을 내세워 안학섭에 대한 제네바협약 위반행위를 저질렀다. 위 보고서는 그의 진실규명 신청 사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1973. 11.경 광주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던 중 전향공작 전담반과 폭력깡패 재소자로부터 물고문 등 갖가지 고문과 구타를 당하며 사상전향을 강요받은 사실"을 언급한다. 조폭들이 전향을 강요하고 물고문을 했다는 것은 한 편의 희극이다.

반공정권이 조폭만 동원한 게 아니다. 위 <강화시선>에서 그는 "옥살이를 하는 중에 유혹도 많이 받았습니다"라며 "미인계도 받았습니다"라고 회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두운 방에 여자랑 둘이 있게 하고, 보도 못한 음식을 주고, 손도 만지고, 허벅지도 만지고 심지어 과부라고 말하며 같이 살면 어떠냐고 하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2009년 11월 3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대한민국이 안학섭에게 잘못을 범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전향공작은 개인의 세계관·인생관·주의·신조 등이나 내심에 있어서의 윤리적 판단을 그 대상으로 하고 공권력이 위법 또는 부당한 직·간접적인 강제수단을 동원하여 신념을 번복하게 하거나 신념과 어긋나게 사상전향을 강요한 것으로서 헌법 제19조가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안학섭에 대한 부당 대우는 석방 이후의 30년 동안에도 계속됐다. 작년에 발행된 <강화시선>에서 그는 "지금도 형사가 붙어 있어요"라며 "2년에 한 번 재판을 합니다"라고 말한다. 2023년에 받은 판결문에는 "재범의 우려가 있고 개전의 정이 없으므로 원심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저는 아직도 좀 험하게 살고 있습니다"라며 "검찰청 조사, 정부 조사도 받죠. 그런데 기소는 하지 않더군요"라고 구술했다. 험하게 사는 쪽은 "저"가 아니다. 정부가 그를 험하게 대했을 뿐이다. 구술록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그의 꿈은 고향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고향이 아닌 북에 가고 싶어 한다. 한국에서 겪은 '험한 삶'이 이런 선택에 영향을 준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안학섭이 한국전쟁에 휘말린 과정을 살펴보면, 전향을 강요한 것은 물론이고 그를 장기간 가둬둔 것 자체가 과연 옳았나를 생각하게 된다. 제네바협약 위반 여부를 떠나, 그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

'비전향장기수' 안학섭씨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 인근을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방 이전부터 소년 안학섭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위 구술에서 그는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 수업 중에 우리말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해 선생님의 꾸중을 들은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조선어독본을 읽고 나서 해석해 보라고 했어요. 해석을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한숨을 쉬고 안절부절못하더니 우시더라고요. 그리곤 무당처럼 몸을 떠시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러신 줄 몰랐어요. '이놈들이 조선말도 못하면서 일본말을 배운다고 해!' 그리곤 칠판에 있던 굵은 회초리로 무지하게 때리는 거에요. 그때 한 반에 82명이 있었는데, 전부 다 때렸어요.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조선어독본이 뭐예요?'라고 물으니 아버지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그걸 왜 물어, 어디 가서 절대 그 얘기 하지 마' 하셨어요. 그 일은 어린 저에게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아직도 성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선생님 같은 인물들은 해방공간에서 빨갱이나 좌익으로 분류했다. 해방공간의 빨갱이나 좌익은 8·15와 함께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있었던 항일인사나 진보 인사들이었다. 일제에 이어 미군정과 친일세력도 그들을 그렇게 폄하했을 뿐이다.

그 선생님의 회초리는 민족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소년 안학섭의 삶은 그런 힘에 이끌려 나아갔다. 그의 작은형은 일제 말기에 강제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했다. 그는 강화도 마니산 근처에서 작은형과 함께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작은형의 반일을 도왔던 것이다.

집안일이라 그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반일을 돕는 그의 행동은 해방 뒤의 삶과도 이어진다. 해방 뒤에 그는 친일파들이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는 길을 걸었다. 친일청산을 촉구하고 민족분단을 반대하는 쪽에 섰던 것이다. 그 혼자만 그 길을 갔던 게 아니었다. 구술록에서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강화도 주민은 거의가 다 좌익 성향이었습니다"라며 "저는 어렸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전국의 분위기가 대체로 그랬다. 해방 직후에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은 당시의 대중이 독립운동진영을 응원했기에 가능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해방 후 몇 주 사이에 행세깨나 하던 부유한 한인들은 부를 나누어주고 부일협력자들을 처단하라는 대중운동에 부닥쳤다"고 한 뒤 "건준이 얼마 동안 전국의 신문·라디오 및 기타 대중매체들을 장악하였으며 부일협력자들을 공격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런 속에서 그는 이념서클인 공산청년동맹에 들어갔다. 이런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는 권총 공격을 받았다. <강화시선>에 따르면, 1948년에 8·15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그는 경찰의 권총 공격을 받았다. 동행했던 이웃 형은 맞고 쓰러지고, 그는 총알이 콧등을 스치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이승만 정권에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안학섭은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친일세력을 온존시키는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 노선의 반대편에 섰다. 이것이 그가 이승만 정권을 향해 총을 든 가장 결정적인 배경이다.

김일성 정권 역시 남북분단에 책임이 있으므로, 인민군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한 부분을 잘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가 총을 든 근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모순과 부조리에 있다. 이승만 정권이 올바로 했다면 그를 포함한 많은 국민들이 그런 식으로 총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학섭에게 일어난 일의 책임을 온전히 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다. 이제라도 그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를 그렇게 만든 잘못된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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