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06 19:11최종 업데이트 25.08.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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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5일 강원도 속초 장사동 일대 야산에 전날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옮겨와 임야를 태우고 있다.이희훈

탄소배출 저감, 에너지 전환, 녹색 금융. 한국의 기후 정책이 말하는 전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전환은 누구의 노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가? 누구의 삶을, 누구의 건강과 시간을 담보로 이루어지는가? 지금까지의 기후위기 대응은 기술과 자본 중심의 협소한 대응에 갇혀 있다. 돌봄, 즉 사람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적 노력은 정책에서 보이지 않는다.

기후위기의 본질은 사람과 지구의 재생산 위기

영국의 여성주의 경제학자 다이앤 엘슨(Diane Elson)은 지난해 11월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연구자·저널리스트들이 협업해 연구 기반의 뉴스와 해설을 제공하는 온라인 매체)에 기고한 '경제 정책은 사람과 지구를 부주의하게 사용하도록 유도한다: 돌봄경제가 해답이다(Economic policies encourage the careless use of people and the planet. Creating caring economies is the answer)'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지금의 위기를 '사람과 지구를 돌보지 않는 경제 구조의 문제(careless practices)'로 규정한다.

그는 기후위기를 '사람과 지구의 재생산 위기'로 보며, 이중의 고갈(depletion)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짚어간다. 하나는 인간 역량(capabilities)의 고갈이다. 과도한 노동, 식량·주거의 불안정, 돌봄 노동의 가치 절하가 그 예다. 다른 하나는 환경 시스템의 고갈이다. 자원의 과잉 채굴, 대기·수질 오염, 생물다양성의 파괴는 지구 자체의 재생 능력을 위협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기후 대응은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한국은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수소경제·스마트 그리드·녹색투자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2024년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기후법이 마침내 미래 세대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개정을 명령했다. 기후위기 대응이 더 이상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헌법적 책무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전환의 언어 속에서 여전히 말해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 2023년 발표된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에도 '돌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후 재난이 반복될수록 장애인과 노인의 보호, 병약자의 돌봄, 아동의 안전관리 등 돌봄의 수요가 증가하며, 그 부담은 온전히 가족에게,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간병인과 같은 저임금·비정규 돌봄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은 기후 대응 정책 어디에도 없다.

기후 정책 목표, 생존 가능성에 맞춰져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주최로 지난 5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공공의료·공공돌봄 강화를 위한 의료연대본부 공동투쟁 돌입 기자회견'에서 병원, 돌봄 노동자들이 "지역의료 붕괴를 막아내고 의료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하반기 공동투쟁"을 발표하고 있다.이정민

다이앤 엘슨(Diane Elson)은 모든 경제 정책이 세 가지 기준, 즉 경제적 효율성, 인권, 그리고 젠더 평등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 대응 역시 이 세 기준을 바탕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특히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정책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는 '균형재정' 논리가 '불균형한 삶의 조건'을 은폐한다고 비판하며, 정책 목표를 '생존 가능성'(livability)을 중심으로 재설계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 삶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에 대해 기후정책이 체계적으로 침묵한다면, 기후 정책이 오히려 돌봄노동에 대한 착취를 더욱 공고히 하는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엘슨은 단지 '여성의 참여 확대' 같은 제도적 보완을 넘어 '돌봄경제(caring economy)'로의 구조 전환을 주장하며, 그녀가 참여한 영국의 여성재정그룹(Women's Budget Group)의 보고서에서 다음의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경제의 재구성으로, GDP 성장 중심의 경제 목표를 폐기하고, 사람과 지구의 '삶의 질' 향상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둘째, 소유구조의 민주화로, 에너지, 돌봄, 주거 등의 기본 인프라를 공공화하고, 협동조합·커뮤니티 기반 소유모델을 확산해야 한다.
셋째, 정책의 전환으로, 탈탄소 물리 인프라뿐 아니라 돌봄·사회 인프라에 대한 공공투자를 중심축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국제 기후 정의 실현으로, 성인지적 기후금융, 채무 탕감, 세제 개혁을 통해 글로벌 남반구의 전환 역량 확대해야 한다.

세계는 젠더 의제 주류화, 갈길 먼 한국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성인지적 기후정책 수립을 위한 젠더행동계획(Gender Action Plan)을 채택한 이후, 당사국 대부분이 젠더 의제의 주류화를 도입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 기후 관련 의사결정 기구 내 여성 대표성도 매우 낮다. 시민사회는 지역 돌봄네트워크, 탈탄소 기반 돌봄공간, 커뮤니티 기반 회복력 등을 제안하고 있지만 이러한 의제는 기후담론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이제 막 출범한 한국의 새 정부가 진정한 기후위기 대응을 말하려 한다면, 더 이상 기술과 시장, 성장과 수출에 기댄 '친환경적 개발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녹색 전환이 단지 신산업 육성과 온실가스 감축 수치에 그칠 때, 그 비용은 다시금 사회적 약자와 돌봄노동자, 여성의 몫으로 귀결된다. 새 정부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의 이름 아래 사회적 재생산의 회복력, 돌봄노동의 존중, 젠더 기반의 불평등 해소를 기후 정책의 중심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윤자영본인 제공

필자 소개 : 윤자영은 충남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노동경제학과 젠더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셜 코리아> 자문위원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노동시장의 성차별과 불평등, 돌봄 노동이 젠더 불평등에 갖는 함의, 돌봄 경제의 사회경제적 가치와 의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한국노동경제학회 이사, 한국사회경제학회 이사, 한국사회정책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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