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방안이 발표된 지난 2023년 3월 6일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피해당사자 양금덕 할머니가 정부안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정권의 본색이 드러나자, 민관협의회 내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일주일이 좀 지난 8월 3일, 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후지코시와 법정 싸움을 벌이는 피해자 측이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했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는 "심각한 유감"을 표시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민관협의회에서 논의된 적도 없고 자신들에게 통보된 적도 없는 사안을 의견서에 담아 대법원을 압박한 외교부를 비판했다. 이들은 "절차를 지연시키려는 모습", "피해자 측의 권리행사를 제약하는 중대한 행위" 등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피해자 측의 탈퇴는 민관 합의의 모양새를 갖추려 했던 윤 정권의 구상에 생채기를 냈다. 향후 상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사태였다.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가 파탄난 것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관협의회 파행은 그것을 연상시켰다.
이 기구가 파행을 겪다가 그해 9월 5일의 제4차 회의로 종결된 뒤, 그해 12월 6일엔 윤 정권이 '현인회의'를 출범시켰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최상용 전 주일대사 겸 고려대 명예교수,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이 '현인'으로 모셔졌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고문회의나 자문회의 혹은 원로회의가 아니었다. '현인회의'는 '유식자회의'와 더불어 일본 정부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었다. 윤 정권에 아이디어를 주는 쪽이 어디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용어 선택이었다.
민관협의회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현인회의 출범에 있었다는 점은 외교부의 그달 6일자 보도자료에서 확인된다. 외교부는 "피해자 측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외교당국 간 긴밀한 대화와 협의를 지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현인회의의 역할을 소개했다.
그런 뒤인 그달 21일, 윤 정권은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정관을 개정했다. "피해보상 및 변제"를 재단의 활동 범위에 넣는 정관 개정이었다. 한국 정부가 재단을 통해 전범기업의 책임을 인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윤 정권은 민관협의회 출범 직후에 대법원에 의견서를 보내고, 현인회의 출범 직후에 지원재단의 정관을 변경했다. 여론수렴 기구를 띄워 국민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 뒤 제3자 변제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성동격서가 2022년 7월과 12월에 되풀이됐던 것이다.
그런데 지원재단의 정관 변경은 법적 문제점이 있었다. 재단의 설립 근거인 강제동원조사법 제1조에 따르면,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위로금 지급이다. 가해자를 대신해 보상금이나 판결금을 지급하는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 정권은 제3자 변제의 근거 조항을 재단 정관에 넣었다. 대법원 판결도 무시하는 정권이었으니,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해를 넘긴 2023년 1월 12일, 윤 정권은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조현동 제1차관과 서민정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전범기업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배상금을 받아 주려는 노력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피해자와 국민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그런 식으로 드러났다.
결국 그해 3월 6일, 박진 외교부장관이 역사적인 '제3자 변제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가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고 표명했다. 전범기업에게 배상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을 행정부가 깔아뭉갰던 것이다.
열흘 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윤석열을 열렬히 환영하고, 정상회담 직후의 두 번째 식사 자리에서 러브샷도 해주었다. 도쿄에 간 윤석열은 한국 대법원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시다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2018년에 그동안 정부의 입장과 또 정부의 1965년 (한일)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선고가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배상책임을 떠안는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통큰 기부'로도 일본 극우세력을 열광시켰다.
국민과 법원이 제동 건 윤석열의 폭주

▲2023년 3월 6일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묻지 않는 ‘제3자 변제’를 핵심으로 하는 윤석열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 발표를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서울광장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린 모습. 참가자들이 윤석열 대통령, 박진 외교부장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서민정 외교부 아태국장을 을사오적과 비교해 ‘강제동원 계묘5적’으로 표현한 피켓을 만들어 규탄하고 있다.
권우성
계엄군이 여의도로 몰려간 12·3 밤중에 계엄군보다 훨씬 많은 국민이 여의도로 넘어갔다. 이는 윤석열의 계획을 망가트렸다. 비슷한 일이 제3자 변제 때도 있었다.
국민들은 전범기업이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는 한 문제가 끝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국민정서가 만들어낸 것이, 시민 성금을 거둬 피해자 측과 함께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제3자 변제에 찬물을 끼얹는 대처법이었다.
2023년 6월 29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의 '역사정의 시민모금'이 개시됐다. 정의기억연대·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민족문제연구소·민주노총·한국노총·전교조·민변 등이 제안한 운동이다. 이듬해 6월 9일까지 6억 5530만 6758만 원이 모금됐다.
시민모금 개시 나흘 뒤인 2023년 7월 3일,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될 일이 윤 정권에서 나왔다. 정부가 주는 돈을 받지 않는 피해자를 상대로 법원 공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도를 이용해 피해구제절차를 종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날 외교부는 제3자 변제를 수용하지 않는 승소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금액을 법원에 공탁했다. 시민모금에 대한 대응의 성격도 띠는 조치였다.
하지만 법원 직원이 공탁을 불수리하면 그만이었다. 전국 8개 지방법원에 신청된 공탁은 모두 기각됐다. 불수리에 대한 이의신청도 마찬가지다. 제3자 변제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시민모금도 이 결과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허물어지기 시작한 제3자 변제안은 결국 법적 타격을 받았다. 2024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전범기업 히타치조센에 대한 압류추심명령 신청을 인용했다. 이는 확정판결 이행을 거부하는 전범기업을 상대로 피해자가 강제집행을 신청하고 채권을 직접 추심하는 것이 합법임을 증명했다. 제3자 변제가 옳은 해법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도 무시하고 피해자도 무시하는 윤석열의 제3자 변제 쿠데타는 그렇게 흐지부지됐다. 이 역시 실패한 쿠데타다. 하지만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삼권분립 침해와 불법·위법 등은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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