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우리말본> 겉표지
한국학연구원
두 차례의 일본 유학을 통해 언어학의 토대를 튼튼히 한 그는 강습이나 신문 기고를 통해 한글 전파에 힘썼다. 일본에서 군국주의 내각이 들어선 것은 그가 33세 때인 1927년이다. 그런 정세 변화로 인해 한글 운동이 한층 어려워진 시기에 이 운동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그는 한글 연구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우리말본>이다. 한글 문법서인 이 책을 1925년부터 집필해 중일전쟁이 벌어진 1937년에 출판했다. 혹시라도 원고지가 없어질까봐 땅속 장독에 원고를 차곡차곡 모아뒀다. 출판 전에는 최대 12년 묵은 원고지들을 꺼내 80번이나 읽었다. 그런 뒤 일본 돈이 아닌 자기 돈으로 출판 비용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 당시의 주택담보대출 제도를 활용했다.
끈기와 더불어 용기와 신념이 요구되는 연구를 통해 그는 한글 대중화에 유익한 각종 장치를 개발했다. 그중 하나는 자음과 모음의 명칭 개정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 자음을 기역·니은·디귿 하는 식으로 읽는다. 이것은 최현배의 연구 성과다.
그 이전에는 기역과 이응까지는 지금과 똑같이 읽지만 지읒부터는 달랐다. 지·치·키·티·피·히로 읽었다. 최현배는 이것을 지읒·치읓·키읔·티긑·피읖·히읗으로 개칭했다. 기역에서부터 히읗까지 일관성을 부여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을 가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이것도 최현배의 작품이다. 한글을 쉽게 쓰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위의 이계형 책은 "최현배는 끊임없이 가로쓰기를 주장했다"라며 "1938년 2월부터 5월까지는 4차례에 걸쳐 '가로쓰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글을 연재했다"고 말한다.
그가 가로쓰기를 완성한 곳은 일제가 제공한 이불 속에서다. 감옥에서 간수의 눈을 피해 이불 속에서 가로쓰기를 궁리하다가 거기서 '득도'했다. 가로쓰기에 맞게 글자 크기나 모양을 조정하는 일들이 그 이불 속에서 마무리됐다.
표준어 확립에도 그의 공이 컸다. 학생들과 함께 각 지방 사투리를 수집하고 표준어를 가려내는 작업이 있었다. 이 역시 우리말글을 쉽게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최현배를 일제가 그냥 둘 리 없었다. '비행기'를 태워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수 생활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그는 실업자가 됐다. 그러나 학교 도서관 직원으로 취직해 한글 연구와 한글 운동을 계속했다. 운동이라기보다는 투쟁이라고 불러야 할 삶의 자세였다.
그의 투쟁은 미군정과 함께 영어가 쇄도하던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그는 영어의 침투가 대세가 된 시기에 일종의 역주행을 했다. 미군정 하에서 한글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공무원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켰다. 수많은 영어의 화살 앞에서 한글 방패를 세운 셈이다.
그는 우리말 되찾기 운동도 벌였다. 한자가 들어가지 않은 낱말인 도시락·단팥죽·메밀국수·세모꼴·사다리꼴·반올림표 등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또 한글 기계화 운동도 벌였다. 타자기로 한글을 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시키는 운동이었다. 한글을 한국 땅의 제1문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궁리를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글을 당연한 듯이 사용하지만, 한글이 제1문자가 된 것은 해방 이후 8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최현배처럼 한글을 사랑하다 못해 한글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없었다면, 해방과 함께 영어가 훨씬 강력하게 확산됐을 수도 있다. 그런 흐름에 제동을 걸고 한글을 정착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이 최현배다.
그는 한글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때로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글을 연구하고 전파했다. 그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어른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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