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KT위즈파크 1루 응원석 직관
정누리
새 학기가 되면 꼭 친구들 사이에 밝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어떤 아이돌의 팬클럽인지였다. 동방신기는 카시오페아, 슈퍼주니어는 엘프, 빅뱅은 VIP…. 같은 아이돌을 응원하는 친구끼리는 금세 친해졌다. 누군가를 그토록 열성적으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꼬박꼬박 콘서트를 가고, 응원봉을 흔들고, 상징색으로 복장을 맞췄다.
성인이 되면서 이때의 기억이 다시 맛보기 힘든 어린 날의 추억으로 남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약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제 어떤 야구 구단의 팬인지를 묻는다. KT, 한화, 두산…. 우리는 이제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입덕의 순간은 늘 한순간에 다가온다. 나의 야구 '입덕' 스토리는 우연찮게 친구를 따라간 KT 위즈 직관 경기에서 시작됐다. 그전까지 난 야구 룰도 잘 몰랐다. "윷놀이 같은 것 아니야? 1루, 2루, 3루 다 뛰면 점수 얻는 거잖아." 이미 진성 야구팬이었던 친구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거리가 많다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간 난 어떤 사전 공부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KT 위즈의 홈구장인 수원 KT위즈파크에 갔다. 당일날 입이 떡 벌어졌다. 엄청난 인파, 다양한 유니폼, 줄지어 서 있는 간식들과 매점 키오스크. 심지어 우리의 좌석은 진성 팬들만 앉는다는 1루 응원석이었다. 모두 선수의 사인과 이름이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가운데, 난 노란색 쫄티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혼자 데이트 복장 차림인 난 등골이 서늘했다. 왠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뻘쭘함도 잠시, 치어리더들이 선보이는 응원송과 안무를 열심히 따라 췄다. 간식을 먹을 틈이 없다. 떡볶이나 족발을 먹다가도 다들 일어서면 나도 따라 일어섰다. "KT 배정대, 나나나나나나. KT배정대, 나나나나나나. 1루, 2루, 3루, 홈 빵야!" 모두 따라 하기 쉽고 인상 깊은 노래였다.
K팝 팬덤에는 대부분이 여성 팬들이었는데, 이곳엔 나보다 체구가 훨씬 큰 아저씨들도 한 손에는 비트배트를 들고 능숙하게 안무를 춘다. KT 마크가 있는 모자를 쓴 꼬마 아이도 선수를 응원한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즐기는 모습에 나도 서서히 녹아든다. 이보다 더 어려운 춤과 노래도 따라 해봤으니, 이 정도 응원가는 식은 죽 먹기다.
마법 보여주는 KT 위즈

▲역전승을 알리는 점수판
정누리
뜨거운 응원도 잠시, 경기는 패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8회 초, 0:5의 점수로 지고 있다. 우리는 아직 한 점도 못 냈다. 베테랑 관객들도 승패가 기울었다 생각했는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 룰도 제대로 모르는 나만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슬슬 자리를 뜰지 묻는 친구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야구가 첫 관객인 날 끌어들이고 싶다면, 이렇게 시시하게 경기가 끝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투 아웃. 관객도 응원단도 의기소침해져갈 때, 갑자기 함성이 터졌다. 8회 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NC 투수가 연달아 공으로 타자를 맞추자 KT 선수들이 진루했고 흐름을 놓치지 않은 장성우 선수가 안타를 터트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볼넷과 사구, KT 김상수 선수의 2타점 적시타 등 연속으로 점수를 7점이나 따버렸다. 마침내 7:5로 대역전승! 그야말로 마법처럼 얻은 승리였다.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얼싸안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주체할 수 없이 심박수가 높아졌다. 이런 짜릿함은 중학생 때 처음 간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느꼈던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 이 유명한 격언을 눈으로 봐버렸다. 큰일 났다. 속으로 직감했다. 난 오늘부로 완전히 KT에 입덕할 것이다.

▲우승 후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선수들
정누리
이제는 야구를 전혀 모르는 친구들에게 KT의 배경에 대해 줄줄 설명해 주곤 한다. KT가 2013년 창설된 막내 구단이라는 점, 그래서 팬도 젊은 층이 많다는 점. 보통 야구팀은 연고지나 부모님을 따라간다. 하지만 KT는 수원에 터를 잡은 사회 초년생, 또는 나처럼 진미통닭, 신포닭강정 등 지역 먹거리에 이끌려 단순히 데이트를 온 젊은이들, 혹은 왕성히 활동하는 치어리더들의 밝은 기운에 이끌려 팬이 된 친구들 등 입덕 이유가 다양하다. 지역 문화가 뚜렷한 야구 문화에서 어떤 이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막내 구단, KT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선수 또한 마찬가지다. 신생구단으로 4~5년 가까이 약체팀 평가를 받아왔던 KT는 2021년 가을야구에서 우승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20년 넘는 경력의 안정된 수비와 센스로 MVP가 된 2루수 박경수부터, 고졸 신인으로 홈런 16개와 102타점 타율 0.347로 최고 성적을 거둬 KBO를 놀라게 한 스타 강백호까지. 누구 하나 원톱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수 간의 탄탄한 밸런스로 우승까지 거머쥔 KT는 '뒷심'이 강하기로도 유명한 팀이다.
더군다나 강백호에 이어 신예스타로 거듭나고 있는 안현민까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 새로운 선수들의 등장은 KT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마술이 아닌 마법을 보여주는 KT 위즈, 그 바탕에는 탄탄한 밸런스와 뒷심이 있었다.
그 자체로도 즐겁다

▲KT와 협업한 메이플스토리의 마스코트 핑크빈
정누리
나를 포함한 수많은 여자 팬들이 유입되면서, 야구 문화도 조금씩 다양해지고 있다. 팬 연합이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커피차와 수제 쿠키 등을 지원하는 등 '조공문화'도 커지고 있다. 유니폼을 자기 취향대로 커스텀하는 '유니폼 꾸미기'도 유행이다.
매년 다양한 콜라보로 나오는 신상 유니폼에 선수들 이름을 단 와펜을 붙이기도 한다. 최근 KT가 메이플스토리와 협업한 분홍색 어센틱 유니폼은 많은 여성 관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어색한 듯 화사한 유니폼을 입고 핑크빈 로고볼을 든 선수들의 모습도 재밌는 포인트 중 하나다.
좋아하는 선수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이즘 사진기'도 경기장 이곳저곳에 비치되어 있다. KBO 포토카드로 하는 '사진깡'도 물량이 없다. 본인이 좋아하는 선수를 뽑기 위해 야구카드를 구입하는 팬들이 많아졌다. 한편 컵물회, 반반새우, 갈비꼬치 등 특색 있는 간식거리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매력적인 K-콘텐츠가 됐다.
물론 이런 MZ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승부와 경기력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의 정통 문화에 반해 선수들을 아이돌 대하듯 따라다니거나, 과한 팬서비스를 요구하는 등 경기력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도 있다. 또한 기존에 없던 조공 문화 때문에 팬클럽 구단끼리 경쟁이 과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이 때문에 자중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흩날리는 KT위즈 깃발
정누리
허나 침체되고 있던 KBO에 젊은 층이 유입되고 있는 것은 분명 청신호다. 과거엔 야구장이 욕설이 난무하거나 만취한 관중들이 간혹 나타나는 '야생의 공간'이었던 반면, 지금은 어린아이나 야구를 모르는 일반인도 쉽게 올 정도의 대형 놀이공원이 됐다.
함께 유니폼을 맞춰 입고 카메라를 향해 춤추는 아이와 아빠, 테이블석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관객들, 누구든 규칙을 모른다고 비난하지 않고 땀 흘리며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 이 장면 하나하나가 나 같은 일반인도 KT 팬이 되도록 만들었다.
규칙도 복잡하고 경기 시간도 길어 꺼렸던 야구가 이제는 되려 그 이유 때문에 좋아졌다. 요즘은 시합이 길게 이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남몰래 한다. 단순히 승리 자체가 내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간식거리도 먹고, 응원도 하고, 모두와 춤을 추는 그 자체로도 즐겁다. KT 위즈가 부린 마법 덕에 올해 나의 한여름은 아름다운 꿈으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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