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내부무에 차없는 거리 청원서를 넣고 자축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Initiative Volksentscheid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이 엄청난 추진력으로 파리 중심가를 차 없는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달고 시장은 그만큼 적도 많이 만들었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은 시장 이름만 들어도 입에 거품을 문다고 한다.
최근엔 추가적으로 500개의 도로에 차량 통행을 금하고 주차장을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여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찬반은 둘째치고 투표 참여율이 4%에 그치는 참사를 빚었다. 정작 파리 시민들은 별반 관심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국민투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파리에서의 국민투표는 베를린에서와는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다. 시장의 좋은 의도를 홍보하고 시민들의 동의를 구한다는 제스처에 그친다. 이는 지금까지 파리의 '차 없는 거리 정책'은 시장이 밀어붙였다는 뜻이 된다. 파리에선 가능할지 모르지만 베를린에선 안될 일이다. 시장에게 그럴만한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총리도 시장도 시민들이 직접 뽑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당과 의원만 뽑고 그렇게 선발된 시의회에서 시장을 뽑는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다수당의 대표가 시장이 되는데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은 2023년 시의회에서 세 번 투표한 결과 간신히 당선되었다.
그는 자동차에 우호적인 인물이다. 차 없는 도시? 어림도 없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의원들을 달달 볶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 보수에서 약간 좌측으로 기울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스로 주장하듯 서민들 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서민이 아니라 자기처럼 '차와 개발사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베를린 시민 중에선 소수에 속한다.
베그너 시장은 베를린 토박이로 서민 출신이다. 상고를 졸업하고 보험설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건설회사 사장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이후 경영 컨설턴트 회사를 차렸으나 그의 주 종목은 정치였다. 19세에 정치에 뛰어들어 1999년 27세에 시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만에 베를린 기민당 대표가 되었고 2023년 지역 선거에서 기민당이 제1 다수당이 되면서 시장으로 선발된 것이다.
그는 시장에 당선되자마자 예산부터 삭감했다. 부채를 줄이기 위함이라는데 문화 예술의 도시 베를린에서 문화 예술 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밉보이기 시작했다. 그 대신 고속도로를 새로 짓겠다거나 템펠호프 자유공원 일부를 헐고 주택을 건설하겠다는 등의 뜻을 밝혀 지지도가 나날이 떨어지는 중이다. 지난 4월 말의 지지율은 21%에 불과했다.
템펠호프 자유공원은 원래 도심에 위치한 폐공항이었다. 약 80만 평 규모인데 2010년 시민들이 '국민투표'를 통해 공원으로 살려 냈다. 공원이기에 앞서 베를린 시민 의식의 상징과도 같은 곳인데 이곳을 범한다면 앞으로 또 긴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베를린에서 지식층, 예술가들, 진보적인 환경 운동가들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경제적으로도 별 소득이 없다. 해마다 몰려오는 1200만 명의 관광객이 새로 지은 고속도로를 감탄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예산이 모자라 연극 무대나 오페라, 콘서트의 수준이 떨어지거나 박물관 하나라도 문을 닫아야 한다면 베를린의 정체성이 흔들릴 것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의 목적
▲'주차장을 공원으로'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베를린 시민들
Initiative Volksentscheid
시장의 성향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와 독일의 근본적인 차이점 때문에라도 베를린에서 '차 없는 도시'라는 목표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 이래로 연방 체제를 지켜 온 독일은 '합의 원칙'의 나라다. 수백 년의 경험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끌어내야 후환이 적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지금처럼 의회에서 결의되지 않은 사안이 떠 오르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죽도록 토론해야 하므로 정책 구현에 이르기까지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된다.
차 없는 도시라는 목표를 많은 사람들이 반기고 있지만 시민연대가 제시한 방법론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너무 급진적이고 강제성을 띠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녹색당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의 의견이 이에 일치한다.
우선 도심과 외곽지대의 이중 구조가 형성되어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적 단절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책을 구현하는데 어마어마한 행정적 절차가 필요한데 과연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보다는 범사회적인 토론을 통해 합치된 새로운 교통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리가 있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으니 싫건 좋건 10월 중순까지는 시의회에서 의결해야 한다. 부결될 확률이 높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내년에 국민투표를 통해서 시민연대의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열린다. 국민투표의 결과에는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 그걸 피하고 싶으면 시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교통정책을 그 전에 내놓으면 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바로 이것을 목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 당국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궁지로 내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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