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옥 농부는 등이 터진 콩들이 맛있다고 했다. 왼쪽부터 독새기콩, 등튀기콩, 홀애비밤콩, 아주까리밤콩
김고은
토종씨앗을 전달하고 나눌 때는 단순히 '씨앗'이라는 물체만 오가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언제 어떻게 짓고 수확하면 좋을지에 관한 지혜를 비롯해서, 땅에 심기 전후 혹은 그 주변부의 이야기까지도 포함된다. 왜 이런 이름이 붙였는지, 어떻게 먹으면 좋고 다른 작물들과 관계는 어떤지가 이야기에 녹아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이 콩이, 그리고 이 콩을 심고 먹었을 사람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개념적인 '콩'과 추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떤 콩, 어떤 사람, 어떤 삶의 양식이 씨앗을 전해 받는 사람의 삶을 가득 채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구체적인 삶의 지반을 만드는 것이다.
토종씨앗과 이야기를 전하다
토종씨앗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지혜이자, 공동의 지식이자, 빅데이터이기도 하다. 오늘날 더 이상 씨앗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씨앗에서 땅에서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소외되는 것은 우리의 뿌리가 싹둑 잘리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권태옥 농부는 기후위기 혹은 재난의 시대에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작물의 생산과 유통이 모두 다국적기업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라고 말했다.
"기후는 우리가 피부로 많이 느끼잖아요. 현장에서 느끼는 거니까요. 되게 심각해요. 작년과 재작년에 특히 충청남도, 전라북도에 집중적으로 비가 왔어요. 한 달 넘게 계속요. 이런 속담이 있거든요. 백일 가뭄에는 살아도 열흘 장마에는 못 산다. 계속 가물면 수확량이 한두 개라도 나오는데, 장마가 계속 이어지면 다 잠기고 수확량이 하나도 안 나와요. 벌레도 많이 생기고요. 그럼 농약을 더 진하게 쓰려고 할 거 아니에요. 악순환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기후위기가 오면 오히려 이야기가 더 필요해요. 달력을 보고 몇 월 며칠에 하는 것보다 자연을 보고 농사짓는 게 더 정확하거든요. 그만한 게 없어요. 오디가 나올 때는 콩을 심으면 좋아요. 보리가 나오면 생강을 심을 때고요. 지금은 뻐꾸기가 울 때예요. 자기 둥지에 안 낳고 다른 둥지에다 알을 낳거든요. 그럼 콩하고 팥하고 준비하는 거죠. 이런 데이터가 많아야 진짜 좋아요. 이게 없이는 기후위기에 대처를 할 수가 없어요."
농부들은 온몸으로 더위와 추위, 비와 바람을 맞는다. 햇살이 어떤지, 습도가 어떤지, 기온이 어떤 속도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따라 작물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한다. 그러므로 기후 변화를 더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권태옥 농부는 근 10~20년 사이에 기후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세상은 더 편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진짜 그런지는 의문이다. 과거에는 씨만 뿌리면 웬만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농약이나 비료가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됐다.
토종씨앗은 그나마 낫다. 자신이 자랄 땅에서, 변하는 기후 속에 맞춰 적응해 왔기 때문이다.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동안 뿌리를 이어온 작물이다. 그런데 다국적기업에서 판매하는 씨앗은 그렇지 않다. 다국적기업의 씨앗은 10~20년 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구체적인 지역의 땅에서 적응한 노하우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도 없다. 불임처리가 된 일회용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태옥 농부가 토종씨앗을 모으고 지키는 일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토종씨앗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모아 잇고, 기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농가와 작물을 전한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기후가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에, 씨앗을 소수의 기업만 가지고 있는 것은 향후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몇 안 되는 다국적 종자회사가 전 세계 씨앗을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눈이 펑펑 와서 채종을 못 하면 어떡해요. 미국 텍사스가 원래 겨울에도 영상 10도 이상을 유지했는데, 갑자기 2021년에 폭설이 오고 영하 22도로 떨어졌어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도 공급이 안 되고 사람들도 얼어서 죽었어요. 공장도 다 멈췄고요. 그런데 만약 다국적 종자회사가 채종하는 곳에 이상 기후가 와서 하나도 채종을 못 하게 되면 어떡해요. 전 세계가 다 여기서 씨앗을 받아서 작물을 기르는데. 되게 심각한 얘기죠. 그래서 우리가 지키는 거죠. 여성 농민이 씨앗 지키는 일을 잘하니까, 우리가 지키자."
▲씨앗을 받기 위해 준비중인 더불어농원
김고은
권태옥 농부는 여성 농민들과 함께 논산 지역에 토종씨앗을 수집하러 다녔다. 벌써 8년째다. 하지만 한 동네를 다 돌아다녀도 한 알이 안 나올 때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없어서 만날 수가 없자, 6~7월 2시부터 5시 사이에 대문을 두드렸다. 가장 덥고 뜨거운 시간이라 집에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땡볕 더위 아래서 비로소 사람들을 만나니 처음에는 토종씨앗이 몇 개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양이 확확 주는 것이 느껴졌다. 토종씨앗은 할머니들만 갖고 있었는데, 많이 심는 몇 가지만 남아 있어 다양하지가 않았다. 그마저도 할머니들이 일찍 요양병원에 가면서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텃밭에서 이것저것 다 심어서 먹던 시대가 지났어요. 한 종류만 농사지어서 갖다 팔고 그 돈으로 다른 걸 사 먹으니까 씨앗이 없어졌어요. 도로랑 가까이 있는 동네에는 거의 없고, 산골에 가면 할머니들이 심고 또 심고 했던 게 남아있어요. 어느 동네에서 하나라도 나오면 그동안 찾으러 다녔던 보람을 느끼죠. 정말 심각해요. 다양하게 나와야 정상이거든요. 다양하지 않아요. 할머니들도 거의 다 돌아가셔서 몇 년 사이에 없어질 것 같아요."
그럼에도 권태옥 농부는 계속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더불어농원에 심어 그 대를 잇는다. 한 행사장에서 누군가 그에게 내년 계획을 물었을 때, 권태옥 농부는 당연한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단다. 그에게는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올해 씨를 뿌리고 씨를 거두었던 것처럼, 내년에도 당연하게 씨를 뿌리고 씨를 거둘 것이다. 올해도 내년도 그 후년에도 권태옥 농부는 토종씨앗을, 토종씨앗으로 일궈낼 땅을, 토종씨앗과 함께 전해질 이야기를, 먹거리의 뿌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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