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03 12:13최종 업데이트 25.07.0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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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목금토일, 이들의 평일 저녁과 주말엔 늘 야구가 있습니다. 운 좋으면 직관으로, 아니면 중계를 보며 선수들과 함께 울고 웃습니다. 1200만 관중을 향해 달려가는 2025 프로야구 돌풍의 중심에는 이들 '찐팬'이 있습니다. 팬심으로 말하는 '내 팀'의 이야기, 야구를 좋아해서 겪어야 했을 희로애락, 지금 시작합니다.[편집자말]
MBC 청룡의 유니폼연합뉴스

지금도 기억난다. 아버지가 건네주신 야구 글러브에 박혀 있던 '5번'이. 그 5번은 82년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만루 홈런을 친 MBC 청룡 이종도 선수의 번호였다.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 살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야구 규칙도 잘 몰랐던 꼬마가 이종도 선수의 홈런을 보고 MBC 청룡 팬이 됐다. 지금까지 그 글러브의 잔상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아마 무뚝뚝한 아버지가 주신 첫 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졸라 MBC 청룡 어린이 회원에 가입을 했다. 그때 회비가 얼마였는지 검색해 보니, 5000원 정도다.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정도 하던 시절에 만만치 않았던 금액이었다. 넉넉지 않던 형편에도 어머니는 야구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어린이 회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어린이 회원 기념품으로 무엇을 받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MS가 찍힌 파란색 모자와 종이 회원권, 얇은 점퍼, 이런 것들이 있었던 듯하다. 나는 아버지가 주신 글러브와 청룡 모자를 쓰고 하루 종일 골목에서 야구를 했다. 80년대만 해도 자동차가 없어 동네 골목은 작은 야구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야구공은 살짝 무른 공(경식)이었다. 진짜 야구공은 홍키공이라고 불렀는데, 맞으면 많이 아파 무서워했다.

배트와 글러브가 없으면 '짬뽕'이라는 짝퉁 야구 놀이를 했다. 투수와 포수만 없지 다른 룰은 야구와 똑같았다. 짬뽕공은 물렁물렁했는데, 아무리 세게 쳐도 홈런이 되기 힘들었다. 놀이터에서 할 때는 정글짐이나 그네 기둥이, 골목에서 할 때는 전봇대가 베이스가 됐다. 공은 툭하면 다른 집 지붕을 넘어 마당으로 넘어가, '공 좀 꺼내 주세요'라며 수시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야구팀은 해태, 롯데, 삼성이었다. 김봉연, 최동원, 이만수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84년까지 대전이 연고였던 OB에도 박철순이라는 스타가 있었다. 연고의식이 확실한 지방팀들은 항상 화젯거리가 됐다. 그러나 지역색이 옅었던 서울팀은 오히려 주목을 덜 받았다. 그럼에도 MBC 청룡 선수들은 어린 나에게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 영웅이었다.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의 호쾌한 타격, 하기룡의 묵직한 투구, 이광은의 다재다능한 플레이 그리고 데드볼을 불사하는 김인식의 투지까지, 모두 어린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중 최고는 김재박 선수였다. 엄청난 순발력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공을 뿌려대던 유격수 김재박. 이종도 선수 홈런으로 입문해 김재박 선수에게 빠진 나는 좌우로 점프하고 공을 캐치하며 그를 따라 했다. 어린 시절, 야구는 친구들과 하던 놀이를 넘어 우리 팀과 선수라는 개념을 가슴 깊이 남긴 첫 스포츠였다.

세련되고 우아한 자율 야구, LG 트윈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한 첫 해 우승을 차지한 LG 트윈스.LG 트윈스

1990년 럭키금성이 MBC 청룡을 인수한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팀명은 LG 트윈스. 야구팀을 운영하기에 벅찼던 MBC가 유일하게 야구팀이 없었던 대기업, 럭키금성과 합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로고도 바뀌고 색깔도 바뀌었지만, 다행히 선수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백인천을 다시 감독으로 선임하며 팬들의 마음을 반영했다.

창단 첫해 LG 트윈스는 말 그대로, 미쳤었다. 파란색에서 검흰으로 유니폼 색이 바뀌어서 그런가, 팀 컬러도 세련되고 젊게 보였다. 투수진은 철옹성 같았다. 14승을 기록한 김태원, 노련미의 끝이었던 김용수, 뱀 같은 공을 던지던 정삼흠, 젊은 패기 김기범, 대들보였던 최일언 선수는 새로운 팀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운드를 다듬었다.

나는 90년 LG 트윈스 선수들 중 김동수와 노찬엽을 좋아했다.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신언호, 윤덕규, 박흥식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팀의 토대였다면 포수 김동수와 외야수 노찬엽은 팀의 엔진이었다. 김동수는 정말 노련했다. 기본기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아 김용수와 정삼흠 같은 베테랑 투수들도 기꺼이 믿고 공을 뿌렸다.

검객 노찬엽은 나에게 터미네이터 그 자체였다. 김상훈 선수가 큰 키에 유연한 타격으로 어쨌든 안타를 만들 것 같았다면 노찬엽 선수는 크고 단단한 체구에서 외야로 호쾌한 타구를 날리곤 했다. 그가 타석에 서면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중학생 사춘기였던 나는 TV보다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듣곤 했다. 캐스터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투수와 타자들의 플레이를 상상했다. 좋아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불리면 제발 스트라이크, 제발 안타가 나오기를 손에 땀을 쥐며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하는 날, 난 방에서 겅중겅중 뛰며 나의 영웅들을 찬양했다.

94년 LG 트윈스 우승 그리고 이상훈

1994년 10월 23일 LG트윈스 선수들이 인천구장에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대형 깃발을 흔들며 트랙을 돌고 있다.연합뉴스

우승을 한 LG 트윈스는 조금씩 청룡의 색을 지워갔다. 1991년 백인천 감독 은퇴 후에, 이광한 감독이 팀을 맡으며 팀 전술과 컬러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때 즈음부터 LG는 고졸 선수를 과감하게 계약하며 데뷔시켰는데,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은퇴를 한 공간을 이 젊은 선수들이 충분히 채워 주었다.

1루수 서용빈, 유격수 유지현, 전천후 수비수 이종렬, 투수 이상훈, 포수 김재현은 센세이셔널 그 자체였다. 이광한 감독은 데이터 야구를 표방했지만 나에게 이때 LG 트윈스는 달리는 야구였다. 6순위로 지명된 서용빈은 필요할 때마다 안타를 쳤고 유지현은, 김재박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라운드에서 날라다녔다. 박종호와 키스톤 수비는 국내 최고였고.

94년 팀 운용의 티끌은 김상훈과 해태 한대화의 트레이드였다. 아쉬웠지만 상대가 한대화였으니, 더 이상 말을 않는 걸로. 오히려 해태 팬들이 더 화가 많이 나지 않았을까. 덕분에 상대적으로 약점이었던 3루수 포지션이 메꾸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의 심금을 울리던 선수는 47번 이상훈이었다. 93년 고려대에서 1순위로 입단한 이상훈의 별명은 야생마. 긴 머리를 휘날리며 왼손으로 강력한 포심을 뿌리던 이상훈은 고등학생이던 나의 마음을 가져갔다. 나중에는 95년 입단 예정이었던 연세대 출신 임선동이 일본에 간다며 갈등을 빚었던 모습과 특히 비교되며 팬들의 충성심을 이끌었다.

94년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야간자율학습 전 저녁을 먹을 때마다 친구들과 야구로 다툼을 벌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두산 팬들. 나는 반 농담 삼아 두산처럼 근본 없는 팀을 왜 좋아하냐고 말하곤 했다. MBC 청룡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LG팬인 나에게 두산은 이상한 팀이었다. 85년 우리 잠실에 불쑥 들어와 서울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94년 LG가 81승 43패, 승률 0.643으로 2위 태평양 돌핀스를 11.5 경기 차로 벌리며 최고의 정규시즌을 보내고, 한국시리즈에서 신바람 야구로 태평양 돌핀스를 가볍게 스윕 하며 우승하자, 교실을 떠들썩하게 하던 싸움이 잦아들었다. 물론, 그 뒤로 두산 팬들에게 고개를 못 들었지만.

수능과 본고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지만 스포츠 신문을 통해 LG 트윈스 뉴스를 빠짐없이 챙겨 봤다. LG 팬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신났고 두려울 것이 없던 우승이었다. 1차전, 이상훈이 7회에 아쉽게 1점을 내주었지만 11회 연장전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김선진의 홈런으로 승리를 했을 때, 쌓였던 수능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1차전 이상훈의 투구는 완벽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칠 테면 치라'는 배짱 투구에 팬들 또한 야생마로 변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후 그가 내뿜는 포효에 모두 함께 소리를 지르곤 했다. 고3 스트레스로 지쳐있던 나에게 그 포효가 얼마나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는지. 47번 야생마 이상훈은 말 그대로 나의 영웅이었다.

2차전 정삼흠의 완봉승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 한국시리즈에서 완봉승이라니, 그의 공은 말 그대로 뱀과 같았다. 인천에서 열린 3차전은 피 말리는 승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정민태의 완벽한 투구에 밀리던 LG 타선이 뒷심을 발휘하며 한 점 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압도적인 1위로 정규시즌을 보낸 저력과 이광한 감독의 뛰는 야구가 만든 결과였다.

마지막 4차전, 나의 영웅 이상훈의 등판, 그가 7회까지 버티자, 수호신 김용수가 마무리를 지으며 최강 LG의 역사를 썼다.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했고, 강렬했으며, 세련된 야구팀이었다. 나에게는 고3,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했던 고마운 팀이었고.

2023년 돌아온 최강 LG, 신바람을 이어가길

2002 한국시리즈에서의 LG 트윈스 마무리 투수 이상훈.연합뉴스

그토록 좋아했던 야구를 1997년 끊었다. 사랑했던 LG 트윈스에도 정을 떼 버렸다. 구단은 별문제 없던 이광한 감독을 내쫓았고 선수협의회를 조직하려는 이상훈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리고 구단과 큰 마찰을 겪던 이상훈 선수와 결별을 선언했다. 혈기 왕성했던 나는 좋아하는 감독과 선수를 순식간에 배척한 LG 트윈스에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

2002년 일본과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훈 선수가 다시 LG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야구로 눈길을 돌렸다. 김성근 감독 밑에서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오는 이상훈 선수를 보며 가슴으로 울었다. 그해 LG는 아깝게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했다.

2003년, '94 Again'을 기대했지만, 다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김성근 감독을 내보내고 데려온 이순철 감독이, '너무 튄다'는 이유로 이상훈 선수를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가 LG를 상대로 세이브를 거두고 '사랑하는 LG를 향해 공을 던질 수 없다'고 은퇴를 하자, 나도 더 이상 LG 트윈스에 마음을 두지 못했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LG 트윈스가 암흑기를 보낼 때, 업보라고, 나는 믿었다. 간간이 인터넷으로 결과와 순위를 보며 조용한 응원을 이어갈 뿐이었다.

어느덧, 청년이었던 남자가 이제 50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물론 롯데와 한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LG 야구는 두산에 비해 참혹했다. 그런데, 2022년 괜찮은 모습을 보이던 LG 트윈스가 2023년에 폭발하면서 그해는 뭔가 결과를 낼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임찬규와 켈리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마운드를 구축했고 김현수가 타격과 라커룸에서 좋은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장 오지환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끈끈함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판단해서 한 발 더 뛰려는 모습이 30년 전 그것과 비슷했다.

2023년 11월 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kt에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LG 선수들이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2023년 마침내 29년 만에 LG 트윈스 우승을 보았을 때,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청년이었던 내가 중년이 될 때까지, 정말 이 팀이 우승이 없었다는, 그래서 그라운드로 뛰어나오는 검흰 유니폼들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감정. LG 올드팬이라면 미칠 듯 벅찬 환희보다 잔잔하고 먹먹한 감동이 밀려왔으리라.

29년 전 고3 시절, 우승으로 힘이 되었던 LG 트윈스, 지금은 그 모습을 한 발 뒤에서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을 이해하는 나이가 된 내가 LG 트윈스 야구를 응원하는 방법이다. 그래도 멜로디가 익숙한 '서울의 아리아'가 응원가로 있어서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응원가를 흥얼거리다 외친다. "무.적. L.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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