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29 19:00최종 업데이트 25.06.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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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원두위키미디어 공용

16세기 중엽 인류의 각성 음료로 등장한 이후 지난 500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커피는 잔인한 음료였다. 소비자에겐 미각과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생산자들에겐 항상 빈곤과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왔기 때문이다. 커피 생산 지역의 농민이나 노동자는 생계비 마련이 어렵고, 커피 소비지에서는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생산자 따로, 소비자 따로인 독특한 음료였다. 적어도 21세기 초반까지는 그랬다.

19세기 노예해방 이전까지 커피 생산은 노예 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근대 이전 대부분의 산업 영역이 그렇듯이 커피 생산 또한 노예 착취에 기반하여 움직이는 잔인한 영역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실려간 400~500만여 명의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생산된 것이 커피였다.


19세기 초반 유럽의 영국, 덴마크 등을 시작으로 노예무역이 금지되었고, 1840~50년대에는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마지막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것은 1863년 미국, 그리고 1888년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의 노예제 폐지가 늦은 것은 커피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지구상에서 노예제는 제도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제도와는 무관하게 흑인에 대한 차별이나 1차 산업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착취 문화는 지속되었다. 특히 중남미 지역 커피 생산에 있어서는 인간에 대한 착취 악행이 지속되었다.

커피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대체한 것은 소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농민과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커피 농장 주변에서는 늘 같은 일이 반복이었다. 커피 농사가 풍년이면 시장 수매 가격이 턱없이 낮아져서 농민과 노동자들은 가난하였고, 흉년이 들면 낮은 가격에도 내다 팔 커피가 없어서 여전히 가난하였다. 비룟값이나 농기구 비용 마련조차 쉽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은 늘 커피 한 잔 가격 이하였다.

노동자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가난을 견디거나 집단행동으로 저항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가난을 견디고 견디다가 모여서 시나 주 청사로 몰려가면 군이나 경찰이 등장해서 진압하였고, 이들의 폭력을 피해 노동자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가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반복된 중남미 지역에서의 국가 폭력이 늘 커피 생산 지대 주변에서 발생한 배경이었다.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롬비아의 '라 비올렌시아', 1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 199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활동은 모두 커피 생산 지역 주변에서 발생한 비극이다.

커피 생산지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 낮은 커피 가격 덕분에 서구 세계의 시민들은 낮은 가격에 커피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즐거움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오래도록 누려왔다.

'막스 하벨라르 라벨'의 탄생

'막스 하벨라르협회' 주도로 탄생한 공정무역 인증도장 '막스 하벨라르 라벨'막스 하벨라르협회

커피 농장 노동자들의 비극적 삶을 경험하고 분개한 인물이 나타났다. 네덜란드 작가 에두아르트 데케르였다. 그는 네덜란드 지배하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젊은 관료였다. 커피 농장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착취를 목격하고 고발했지만 시정은커녕 고발자인 자신이 좌천을 당하였다. 19세기 중반이었다.

데케르는 사표를 던지고 귀국한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1860년에 간행된 소설 <막스 하벨라르>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경영하는 커피 농장에서 자행되고 있던 강제할당생산제도(quarter system)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풍년을 기준으로 배당된 생산량을 채워야 하는 커피 농장 노동자들과 소규모 커피 생산 농민들의 비극을 다루었다. 그는 자신의 아바타인 소설의 주인공 하벨라르의 입을 통해 세상을 향해 외쳤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악, 죄악, 범죄가 있다. 그것은 양심의 부재다." 자신의 조국 네덜란드의 양심 부재를 용기 있게 세상에 알렸다.

'하벨라르'라는 이름이 다시 세상에 빛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1986년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는 커피 무역에서 불공정 거래를 타파하고 멕시코 농부들의 땀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 '하벨라르재단'을 만들었다. 멕시코의 커피 농부 조직 우시리의 자활 활동에서 영감을 얻고, 우시리와 협력을 시작하였다. 우시리를 통해 커피 생산자들의 목소리와 하소연을 유럽의 커피 소비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커피 생산자들이 유럽의 시민단체들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이 생산하고 있는 커피를 정당한 가격으로 구입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요청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하벨라르를 탄생시킨 네덜란드 시민단체들이었다. 1988년에 '막스 하벨라르협회'가 창설되었다. 이 협회 주도로 공정무역 인증도장, '막스 하벨라르 라벨'이 탄생했다. 지금은 일상화된 공정무역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가장 잔인한 음료인 커피의 생산과 유통이 지닌 극한적인 모순으로부터 공정무역의 필요성이 싹텄고, 그 싹을 키운 것은 가장 잔인한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였던 네덜란드의 성직자와 시민단체, 그리고 커피 소비자들이었다.

공정무역 개념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22년 전인 2003년이었다. 당시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있던 이성형 박사가 <한겨레>에 연재한 '세계사 뒤집어보기'의 한 주제로 커피를 다루었고, 그 네 번째 이야기로 '막스 하벨라르, 커피 공정무역의 상징'을 소개하였다. 당시 유럽에는 3만 5천 개 슈퍼마켓에서 130개 상표의 상품이 공정무역의 정신 아래 거래되고 있었다. 당시 공정무역의 혜택을 입고 있는 소규모 커피 농가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40개국 70만 가구에 달하였다.

당시 커피에서 시작한 공정무역이 카카오, 차, 설탕, 오렌지주스, 바나나, 꿀 등으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편이었다. 희망적인 것은 공정무역의 가치에 지지를 보내는 분야와 참여 기업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정무역에 보다 큰 관심 필요한 시대

일반 거래를 통해 농민들이 받는 수익은 0.5%밖에 안 되지만 공정무역으로 거래하면 농민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6%나 된다.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23년이 지난 2025년 현재 우리나라 커피 소비 시장에서 차지하는 공정무역 커피의 비중은 전체의 1% 내외를 차지할 뿐이다.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커피 시장에서 공정무역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5.8%, 전체 시장 가치 기준으로는 5~6%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 커피 소비 시장에서 공정무역 커피의 비중이 낮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정무역 커피에 대한 인지도가 전체적으로 낮다. 소비자들이 커피 구매 시 고려하는 요소에서 공정무역은 순위가 매우 낮다. 카페나 커피를 선택할 때 맛, 브랜드, 가격 등을 우선시할 뿐 윤리적 소비에 대한 고려는 약한 편이다.

둘째, 커피 시장에서의 극심한 경쟁 상태가 공정무역 커피의 유통을 가로막고 있다. 10만 개를 넘긴 카페 사이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카페 경영자는 가격 경쟁력 저하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공정무역 커피의 선택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셋째, 커피 가격 인상에 대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높은 민감성도 공정무역 커피의 유통 확대를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경기가 불안하거나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커피를 소비하는 행위나 커피 가격 인상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현실 세계에서의 커피 가격 인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일반 무역 제품에 비해 비쌀 수밖에 없는 공정무역 커피의 증가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2003년 당시 4000원이었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현재는 5500원 수준이다. 23년 동안 37.5% 상승하였다. 반면, 200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2030달러로 세계 49위 수준에서 2025년에는 3만 7000달러로 세계 28위,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6위 수준에 이를 것이 예상된다. 23년간 300% 이상 상승하였다.

물론 커피 한 잔 가격이 8000~9000원 수준인 카페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2000~3000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저가 카페도 많다. 고급 카페와 저가 카페의 공존으로 우리나라 카페에서의 커피 한잔 평균 가격은 3.56달러(5000원) 정도다. 미국보다 조금 낮고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국민소득의 증가는 국민 복지 수준의 향상 압력으로도 작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제 사회에서의 책임 증가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밖에 없다. 커피를 즐기는 한편 공정무역에 대한 보다 큰 관심, 커피 생산지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 향상에 대한 보다 큰 관심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공정'을 내세우며 등장한 정권이 불공정을 일삼다가 무너졌다. '공정무역' 참여의 확대로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나라, 진짜 대한민국의 미래 모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한겨레>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2003년 커피 관련 기사 일체.
이길상,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2021)
이길상,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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