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장의 수첩>
민음사
이 책은 표지가 귀엽다(!) 추리소설이 실렸을 것 같은 핸드북 크기의 파란 책이 어학당 노조가 27차례 교섭을 해낸 기록이라니. 문학책 특유의 여운이 느껴지는 표지가 여느 노동 에세이 표지와 사뭇 다르다. 맥주를 마시는 거북이의 상반신이 붉은색 삽화로 실려 있어 더더욱. 실로 이 책에는 저자가 퇴근 후 혹은 집회 후 맥주를 사 들고 귀가하는 장면이 여럿 펼쳐진다. 아하, 그래서 맥주를 든 캐릭터가 그려져 있구나. 독자는 어느 순간 설득돼, 지부장의 행적을 콩트 읽듯 뒤쫓게 된다.
그리하여 <지부장의 수첩>의 매력 포인트 첫 번째는, 저자가 못내 어색해한다는 점이다. 지부장도 지부장이 처음이라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소박하게 의지를 다지는 일기 속 문장들을 읽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노조 설립 초기, 낮술을 참고 귀가해 집행부로 나선 동료들에게 줄 컵받침을 베틀로 짰던 일과를 회고한다. 동대문시장에서 램스울 열 뭉치를 사와 흰 실과 검은 실을 꼬아 컵받침을 만들어 선물 상자에 곱게 쌓는 아저씨라니, 묘하게 다정스러워지는 것이다.
키워드 2: 존엄을 지키는 마음
이토록 소시민적인 노조 지부장의 일기라니, 느릿하고 잠잠하며 싸우고자 하는 투지가 아주 투철해 보이진 않는(?) 매력에 독자는 솔깃해진다. 노조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영화 <캡틴 마블>을 보고 힘을 얻은 덕이었다고. 그렇게 지부장 최수근이라는 사람의 세계에 아리송한 마음으로 접속해 스며든다.
저자는 어릴 적 말을 더듬는 습관으로 모국어를 '낯설게' 감지했다고 한다. 발음하기 힘든 단어를 적어 보거나 다른 단어로 바꾸는 훈련을 거치며 한국어를 익혔단다. 그 덕분에 한국인이 숨 쉬듯 사용하는 한국어를 외국인 관점에서 교육하는 감수성을 기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저자는 한국어 교육자가 모국어를 낯설게 여기는 일의 긴요함을 책에 시사한다.
"선생은 숨 쉬는 법을 가르치듯이, 걷는 법을 가르치듯이 한국어를 가르친다. 자연히 선생은 자신의 숨과 걸음을 낯설게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구수한 선생님께!'라고 적힌 베트남 학생의 편지를 받는다. (중략) 한국어의 '따뜻하다'는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고, 그래서 사전을 뒤져 '구수하다'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학생은 모국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나는 익숙한 언어의 낯선 쓰임을 발견했다."
-<지부장의 수첩>(최수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중에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능통하게 모국어를 구사한다는 점,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능력이 있음을 잊었을 때 선생은 학생을 환자 또는 아이로 다루게 될 수 있다며 저자는 이를 경계한다. 학생을 고치려 드는 태도 대신, 존엄한 존재로 보는 태도를 꾸준히 잃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 존중의 태도는 지부장이 교내 다른 노동자와 연대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을 대신해 세브란스병원 농성장 천막을 지킨 날, 곁을 지켜준 집행부 동료에 대한 고마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존엄함이 훼손되면 나의 존엄함도 훼손되는 일터라는 이 막연한 세계에서, 동료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같은 어학당 지하에 자리한 청소 노동자 휴게실에서 보늬밤 조리법을 논했던 하루, 학생회관 앞에서 피케팅 중인 어학당 노조원들에게 고생 많다며 음료수를 건네준 경비 노동자의 조력도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의 비밀 일기엔 은근히 동료가 많다.
저자는 일기 끄트머리에 다음 말을 옮겨 담는다. 민주노총 총연맹 선거 당시 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한 후보자가 한 말,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을 합니다." 이는 저자가 독자에게 건네는 선언이자 이 책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키워드 3: 야만을 견디는 마음

▲"우리는 한국어학당 강사입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시리즈" 유튜브 영상 캡처.
스튜디오 알 Studio R
2019년 1월 시작된 지부장 일기는 어느덧 2021년 10월에 다다라 수확을 얻는다. 27차례 실무교섭과 165일 피케팅을 거쳐 어학당 최초의 단체교섭안 체결이 이뤄진 것이다. 교섭을 통해 어학당 강사 노조는 약 3%의 시급을 인상하고 유급 경조휴가 등을 신설해낸다.
이 모든 숙제를 달성하며 그가 일기마다 고통스럽게 언급한 단어 중 마음에 유난히 박힌 것은 '야만'. 실무교섭을 벌이던 중 한 교섭위원이 "너무 과한 건 아시죠"라며 면박 준 일화, 괴로운 표정을 지을 것을 요구한 취재기자 요구에 응하며 굴욕감을 느낀 일 등을 옮기며 지부장은 말한다.
"여기는 야만적인 세계. 야만적이어야 이길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더 야만적일 줄도 알아야 하는 세계."
저자를 향한 모멸감의 펀치에 독자도 순간순간 아찔해진다. 특히, 과거 저자를 가르쳤던 한 교수가 "착한 애였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니"라며 자기에 대해 한 말을 전해 들은 지부장은 서늘하게 마주했을 것이다, 폭력적이고 우아한 한 방관자의 '야만'을.
그는 책 끄트머리, 어학당에 전임으로 취직한 제자 소식에 몹시 기뻐했다는 해당 교수에게 편지를 띄운다.
"어학당에서 신규 채용을 할 때 단기계약직으로 뽑지 않고 전임으로 뽑도록 그곳 어학당의 조합원들이 애썼던 걸 아시나요? 교수님의 제자가 전임으로 채용되는 데는 노동조합의 노력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교수님의 제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노동조합은 애쓰고 있습니다."
- <지부장의 수첩>(최수근) '2022년 11월 17일' 중에서
그는 감당했을 것이다. 노조의 최전선에서 책임을 위임받아 의사결정을 내리는 직책이 주는 몹시도 낯선 어색함을. 사측을 설득해내며 자신과 동료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노조를 삐딱하게 보는 선한 방관자들이 뱉는 야만적인 언행을.
그러나 저자는 끝내 타인을 환멸하지 않는다. 이는 <지부장의 일기>가 가진 미덕이자, 내향인 지부장의 슬기로운 노조 생활법이지 않았을까.
"어떤 때는 우리가 바위가 돼 계란을 깰 때도 있는 거죠."
화섬식품노조 20년의 기록을 담은 책 <우리 같이 노조 해요> 속 구절이다. 어쩌면 지부장 최수근도 노조 생활을 하며 단단해져가는 자기 심지를 어루만지며, 노동자가 꼭 '계란'이라는 법은 없다는 걸 공감했겠다. 퍽 유머러스해도, 그건 감당하는 마음 한 편의 무엇이었을지도.
그렇게 대자보 한번 안 써본 사람은 되어 간다, 누군가의 버팀목이.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와 함께하는 사람으로. 대자보를 소리 내 읽을 줄 아는 사람들과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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