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23 14:53최종 업데이트 25.06.2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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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21일 제주시 연삼로 국민의힘 제주도당사에 마련된 간담회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5.6.21연합뉴스

김용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제주 4·3 발언이 현지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제주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21일 국민의힘 제주도당 당사 기자회견에서 그는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보수적 시각과 진보적 시각이 대립되어 온 부분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념 대립 속에 제주 주민들의 삶이 처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라며 4·3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렸다.

그는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총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제주 주민들을 잔혹하게 희생시켰다"고 발언했다.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 총파업에 대한 진압과 이로 인한 민간인 희생'으로 4·3항쟁을 규정한 것이다.


21일자 <제주의소리>에 따르면, 위 발언을 들은 참석자들은 혹시 실언이 아닌가 싶어 "남로당의 총파업으로 표현한 게 맞느냐?"고 확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김용태 위원장은 "과거 4·3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의 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함으로써 실언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그는 "4·3은 제주의 아픔이자 대한민국의 아픔", "누군가 이 사건을 단순히 공산주의 폭동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제주도민과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4·3을 폄하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은 이 발언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총파업'이란 표현은 좀 엉뚱하다. 1948년 2월 26일의 유엔 소총회 결의에 근거한 남한 단독 선거 실시를 반대하며 일어난 것은 그해 4월 3일의 무장 궐기이지, 전년도 3월 10일의 총파업이 아니었다. 이 파업은 1947년 3·1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경찰 발포에 대한 항의 운동이었다.

파업의 주체 역시 남로당이 아니었다. 남로당이 배후에서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역은 제주도민들이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라며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운송업체·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 미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노동자·교사·학생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고 사건을 정의한다.

남로당 총파업이 아니라 민·관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청 직원까지 참여하는 전도(全島) 차원의 운동이었다. 남로당을 꼭 집어 남로당 총파업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4·3을 남로당과 등치시키는 것은 4·3을 폄하하는 세력의 주 무기다. 남로당이 역사에 중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반공세력이 '남로당=빨갱이'와 '남로당=4·3'을 선전해왔으므로 남로당을 4·3의 주체로 거론하는 김용태 위원장의 발언은 논란의 소지가 크다.

과거의 반공정권들은 '4·3은 남로당 공산폭동'이라는 전제하에 4·3 학살을 자행하고 진상규명을 훼방했다. 남로당을 4·3의 주체로 거론하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그런 역사를 떠올리게 할 만하다. 더군다나 그는 반공정권의 후예인 국민의힘의 대표다. 그의 발언에 대한 분노는 당연한 반응이다.

위 <제주의소리>는 "이승만 정권과 응원경찰·서북청년단 등은 '제주도민=빨갱이'라는 시각으로 잔혹한 일을 일삼았고, 민주화 이후 4·3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기 전까지 도민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단어가 빨갱이다"라면서 "3·10총파업을 '남로당 총파업'이라고 표현한 김 위원장의 발언은 아픈 도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제주도당도 22일 성명을 통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날 발행된 <헤드라인제주>에 따르면, 민주당은 "일부 극우세력의 주장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한 김 위원장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무지에 참담함을 넘어 분노한다"라며 "김 위원장의 역사인식이 제주 4·3을 왜곡·폄훼하는 일부 극우세력과 같이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기까지 하다"고 밝혔다.

김용태 위원장의 말처럼 남로당 제주도당이 4·3에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당이 4·3의 주역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4월 3일에 궐기한 세력은 일반 도민들이었다.

4·3 무장대가 갖고 있다가 노획당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에는 "13면 중 구좌·성산·서귀·안덕·추자의 5면을 제외한 제주읍·조천·애월·한림·대정·중문·남원·표선의 8개 면에 유격대 조직, 도(島)에는 군위(軍委) 직속의 특경대를 편성"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 뒤,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을 포함한 320명으로 무장대를 구성하고자 계획했으며 4월 3일 당일에는 당초 예상보다 많은 350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민애청 조직이 4·3 무장봉기 때 자위대와 유격대의 핵심 근간"이었다고 말한다.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가 무장봉기의 주력부대였다는 설명이다.

민애청은 남로당과 별개 조직이었다. 이 점은 제주 주둔 미군사령부가 1948년 6월 20일 작성한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에도 언급됐다. 위 4·3 보고서에 따르면, 이 미군정 보고서는 "민애청·민주여성동맹·전평 등 관련 조직은 명목상 독립된 단체인데, 남로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많은 구성원들이 이중 회원으로 있다"고 알려준다.

민애청이 남로당을 지지하고 민애청 회원이 남로당 회원인 경우도 많지만 두 조직은 상호 독립적이라고 미군정은 파악했다. 4·3은 민애청 회원과 남로당 당원을 포함한 제주도민들이 참여하고 도민 대부분이 지지한 항쟁이었다. '민애청이 주도했다', '남로당이 주도했다'기보다는 도민 전체가 벌인 일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이를 외면한 채 남로당 하나만을 꼭 집어 남로당 폭동이니 빨갱이 폭동이니 하며 몰아붙이는 것은 기존의 반공세력이 구사했던 방식이다.

4·3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걸러낼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이 작동했다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역사인식이 당 밖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번 일은 4·3에 대한 국민의힘 내부의 학습과 재인식이 절실히 필요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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