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퀴어> 포스터
㈜누리픽쳐스
"다음 스텝으로 무엇이 좋을까요?"
메시지의 끝은 단호하고 확고했다. 마치 일을 진전시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6월 7일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인 시인이자 번역가인 스틴 안(Stine An)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큐플래닛은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지원하는 한국 최초의 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이 만들고 운영하는 채널이기도 하다.
이 계정의 관리자이자 채널의 기획자인 나는 스틴과 그렇게 첫 대화를 시작했다. 스틴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영화 <퀴어>의 각본가인 저스틴 커리츠키스가 한국퀴어영화제에 성명을 전달하고 싶다는 것. 물론 <퀴어>가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독립영화계의 주류 배급사인 A24가 배급하고 유명 스타인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고 있다. 또한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챌린저스>로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가진 루카 구아다니노이다. 이런 작품의 각본가가 왜 갑자기 한국의 작은 퀴어 영화제에 성명을 전달하겠다는 제안을 한 걸까.
사연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 달력을 5월로 넘겨야 한다. 지난 5월 1일 예술 전용 영화관인 아트하우스 모모는 한국퀴어영화제에 일방적인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영화제 개최가 두 달도 남지 않았고 대관 협의와 계약서 검토까지 진행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바로 작년에 같은 극장에서 한국퀴어영화제가 순조롭게 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통보의 배경에는 보수 개신교계 성소수자 혐오 집단의 조직적 행동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퀴어영화제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최되는 걸 막기 위해 서명을 진행하고 극장이 위치한 이화여대의 총장실 및 학교 본부에 전화 항의를 했다. 주요 이유는 퀴어 영화 상영이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행위이며 학교가 동성애 홍보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화여대는 아트하우스 모모에 "학교 창립 이념인 기독교에 반하는 영화 상영을 학교 내에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예술 극장 아트하우스 모모는 이를 수용했다.
퀴어 영화제를 쫓아내고 퀴어 영화 상영?
각각 교육과 예술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학교와 극장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무척 부적절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을 비판했는데 나 또한 같은 내용의 칼럼을 쓰고 영상을 제작했다. 하지만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아트하우스 모모가 영화 <퀴어>의 상영을 예고하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한국퀴어영화제를 쫓아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목만 <퀴어>이지 영화의 내용은 성소수자와 무관한 게 아니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 S. 버로스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50년대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두 남자의 뜨거운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혹시 영화가 온건하거나 건전해서 상영해도 괜찮은 건 아니냐고? 영화 <퀴어>에 대한 많은 수의 외신 기사들이 주목한 건 작품의 파격적인 수위였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나 역시 그랬다. 퀴어 영화제를 내쫓은 것도 분기탱천할 일이지만 그런 극장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제목부터 <퀴어>인 퀴어 로맨스 영화를 상영하겠다고? 이건 몰아내야할 취급을 당한 퀴어들에 대한 모욕이자 예술 극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행태였다. 그래서 퀴어 유튜브 채널인 큐플래닛을 통해 다시 한 번 이를 비판하는 영상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큐플래닛의 콘텐츠들 중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상황을 알리기 위한 영상은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만들고 있는데, 이 영상 또한 그렇게 제작하기로 했다. 같은 내용의 영상을 두 개의 언어로 두 번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우리 영상을 보는 누군가가 한국의 상황을 알고 연대할 수 있다면 그만한 고생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록 아주 소수일지라도 말이다.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의 한국퀴어영화제 대관 거부 이후 영화 <퀴어>를 상영하는 것에 대한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의 비판 영상 중 일부
비온뒤무지개재단
놀라운 우연과 낯선 사람들의 노력이 겹쳐 만들어낸 결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마음으로 영상을 만들었고 업로드를 마쳤다.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는 예산도 거의 없다시피 한 채널로서 우리가 가진 전파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대의 카메라를 높고 그 앞에 앉아 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거의 전부다. 업로드를 마친 후 예상한 정도의 반응이 있었고 나는 영상이 할 만큼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스틴 안의 메시지를 받은 건 그 무렵이었다.
스틴은 나에게 우리의 작업에 감사하며 이 영상을 영화 <퀴어>의 각본가인 저스틴 커리츠키스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상을 본 저스틴 커리츠키스가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의 행태에 분노하며 한국퀴어영화제에 도움이 된다면 성명을 써서 전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글의 처음에 언급한 일은 여러 사건과 과정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우연을 거쳐 벌어진 셈이다.
"퀴어가 그저 퀴어이듯, 퀴어 영화도 그저 영화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의도적인 무지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는 이미 낙인 찍힌 사람들을 추가로 위협하고, 스스로의 지성과 인간성을 모욕합니다."
커리츠키스는 성명에서 좋은 영화는 현실을 반영할 뿐이고 퀴어는 어디서나 존재해왔다고, 그리고 영화가 탄생하던 최초의 순간부터 퀴어들은 창작과 관계를 맺어왔다고 설명하며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불온하고 일탈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성소수자 역시도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좋은 영화는 그저 현실을 반영한다'는 커리츠키스의 말처럼 퀴어 영화도 그런 소수자들의 삶을 반영한 영화일 뿐이다. 쫓아내고 몰아내고 검열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영화 <퀴어> 스틸컷
㈜누리픽쳐스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지난 사건을 곰곰이 돌아보며 나는 이 모든 사태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생각했다. 사람은 사람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커리츠키스가 성명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은 진실에 헌신하는 곳이며 아트하우스는 예술의 가치를 수호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는 혐오 집단의 의견을 수용하고 '퀴어 영화제'를 몰아내며 성소수자인 우리도 동등하게 그저 사람일 수 있을 권리를 손상시켰다. 우리도 다를 것 없는 인간이라는 진실은 무시되었다. 그러면 평등하게 대할 필요도 없어진다. 불온한 것 취급하며 내다버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대학과 예술 극장으로부터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떠올랐다. 우린 모욕감을 느꼈구나. 상처를 받았구나.
어쩌면 그것이 이화여대의 재학생들이 학교의 처사에 대항해 포럼을 열고 직접 이화여대만의 퀴어영화제를 개최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또한 그 감정에 영상을 만들고 올렸다. 스틴 안 또한 이 지점을 명백히 이해하기에 <퀴어>의 각본가에게 영상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퀴어> 각본가 저스틴 크리츠키스 역시도 이 지점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가 성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이 '스스로의 지성과 인간성을 모욕하는 일'이라 비판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크리츠키스는 이화여대와 아트하우스 모모가 한국퀴어영화제 대관 거부 결정을 재검토하고 '다양한 인간적 경험을 다루는 모든 표현에 대한 국내와 해외 영화를 모두 환영'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학교와 극장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선택할지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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