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19일 뉴오타니호텔 도쿄에서 열린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축사하고 있다. 2025.6.19
연합뉴스
수상관저 홈페이지에 게시된
기념사에 따르면, 그는 "60년 전인 1965년 6월 22일 이곳 도쿄에서 국교정상화의 기초로 일한기본조약의 서명이 이뤄져, 오늘날에 이르는 양국관계의 최초의 한걸음이 내디뎌졌습니다"라는 말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체결의 의의를 평가했다.
뒤이어 "금년은 다음 60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라며 2025년의 의미를 부여한 그는 "이제까지 구축돼온 기반에 근거해 양국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도록 긴밀한 의사소통을 계속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양국 정부가 한일관계 기반 구축한 세 번의 경우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양국 정부가 한일관계의 기반을 함께 구축한 일은 세 번 있었다. 1965년에 박정희 정부와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이 첫째이고, 1998년에 김대중 정부와 오부치 게이조 내각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내놓은 것이 둘째이고, 2023년에 윤석열 정부가 기시다 내각과의 제휴하에 강제징용 제3자 변제 방침을 선언한 것이 셋째다.
1965년 협정은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처리 없이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1998년 공동선언은 오부치 총리의 사과를 받아냈지만 구체적인 피해복구 장치가 없었다. 2023년 선언은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의 책임을 한국정부가 떠안겠다는 공표였다. 이 선언은 일본 측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길을 가로막음으로써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법적 지위를 더욱더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시바 총리가 말한 "이제까지 구축돼온 기반"은 위의 셋이다. 이 셋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60년을 걸어나가자는 것이 일본정부가 한일협정 60주년을 맞이해 내놓은 입장이다. 윤석열·기시다 정부가 구축한 2023년의 흔적을 지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9일 한·일 정상 전화통화에서도 그런 인식을 드러냈다.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통화 요지에 따르면, 그는 "쌍방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에 기초해 일한관계를 더욱 앞으로 진전시키고 싶다"고 피력했다.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되 그 전제는 위의 세 가지'라는 함의를 담은 발언이었다. '그냥 이대로 가자'는 것이 그가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에 더해, 제2기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무역전쟁뿐 아니라 군사전쟁 위험까지 고조되고 있다. 세계 정세가 이처럼 요동을 치므로, 한·일의 협력이 더 절실해진 것이 사실이다. 식민지배 문제와 더불어 안보문제에서도 협력 필요성이 점증하고 있다.
이런 협력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가 없는 제휴는 적과의 동침이 될 수 있다. 1965년 협정과 2023년 선언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점을 띠고 있다.
위 두 가지는 양국관계에 대한 한국민들의 신뢰를 떨어트려왔다. 한국인들의 인권 및 존엄성이나 민족적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한 사유 없이 한국인들의 경제적 권리를 훼손했다. 수백 만의 징용·징병·위안부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봉급과 손해배상청구권이 묶이게 됐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에서 신뢰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신뢰관계 형성을 원한다면
2018년 10월과 11월에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2023년 12월과 2024년 1월에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히타치조센·후지코시를 상대로 대법원 승소판결을 받은 징용 피해자 67명 중에서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자금을 받은 피해자는 26명이다.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고 정식 지급하는 배상금은 아닐지라도, 대법원 승소판결과 관련해 자금을 수령한 피해자나 유족은 그 정도다. 대법원까지 가는 동안에 인생과 시간과 금전을 쏟아부은 피해자와 유족들이 승소판결을 받은 뒤에도 마냥 기다리는 현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일자 언론보도에 소개된 유족 최모씨는 "3년 전 돌아가신 모친 병원비, 간병비 등으로 대출을 6000만 원 정도 받았다"라며 "최저임금 받고 일해서는 이 대출금을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힘이 든다"라고 토로했다. 잘못된 방침인 제3자 변제 방안을 요란하게 홍보한 윤석열 정부가 그나마 이 방침에 대해서도 열성을 보이지 않은 결과다.
징용 피해자 대부분은 빈곤층 출신들이다. 일본에 끌려가 육체적·정신적·경제적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그 손실을 자기 생애 내에 복구하기는 더욱 쉽지 않은 이유다. 그로 인해 일생을 허덕이다 보면, 빈곤과 상처가 자녀 세대까지 대물림될 가능성이 크다.
상당수의 피해자는 고통과 치욕을 참을 수 없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법정투쟁을 했다. 이들의 경제적 곤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해방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적어도 금전적 측면만 놓고 보면, 일본 정부와 재벌기업들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80년째 방치하고 있으니, 한일관계는 불신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는 위 기념식장에서 한일관계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웃을 잘 알고 싶다는,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심정"으로 표현했다. 한국 피해자와 유족들이 80년째 겪고 있는 위와 같은 고통은 배제된 발언이다.
이는 지금의 한일관계가 한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를 개선하지 않은 채로 다음 60년을 맞이하자는 것은 피해자와 유족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의 아픔을 앞으로도 그냥 지켜보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기본적인 신뢰관계도 구축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한국의 안보를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이시바 총리가 언급한 "이제까지 구축돼온 기반"에 따르면, 한국인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갖고 법원을 찾아서는 안 된다. 윤석열 정부는 그것을 더욱더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정부가 다 떠안을 테니 더 이상 일본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의 제3자변제 선언을 했다. 이것이 진정한 해법이 아니라는 점은 고령의 피해자와 유족들이 지금도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일례로, 지난 4월 22일에는 징용 피해자 이모씨 등 3명이 미쓰이광산의 승계자인 일본코크스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일부승소판결을 받아냈다.
5월 9일에는 107세인 김한수 할아버지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똑같은 승소판결을 받았다. 지난달 30일에는 징용 피해자 송모 씨가 후지코시를 상대로 같은 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같은 판결을 얻어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계속해서 법원 문을 두드리고, 법원은 '일본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계속 내리고 있다. 한·일 양국이 구축한 해법이 한국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납북자 문제를 가장 앞에 놓는다. 이를 위해 백악관도 끌어들인다. 일본정부는 자국민 인권이 가장 중요하다는 명분하에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한국민의 인권을 한일관계 테이블 밑으로 떨어트린다. 강제징용·강제징병·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인 납치피해자 이상의 고통과 수난을 당했는데도 이런 문제들을 자신들의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
일본인 납북 피해자 문제가 중요하듯이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일간에 신뢰가 생기기 힘들다.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피해자와 유족의 눈물부터 닦아주는 것이 새로운 한일관계의 출발점이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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