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유한양행
그런데 그가 모든 유형의 정경유착을 다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제국주의 지배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독립운동 앞에서만큼은 정경분리 논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지금은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정치로 인식될 때도 있었다. 일례로,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3·1운동의 얼 유관순>에는 일제 간수가 어린 독립운동가 수형자들에게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정치에 무슨 상관을 하느냐?"라며 면박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유일한도 그런 의미의 정치에는 헌신적이었다. 그가 그런 '정경유착'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주 지역 사업을 위해 미국에 체류한 기간 동안의 행적이 증명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3권에 따르면,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자격으로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을 보내고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 편성을 후원했다. 1945년에는 미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무전법·촬영법·파괴법·낙하산 훈련 등을 받았다. 미국에 체류 중인 회사 오너가 이런 활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적극적인 '정경유착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유일한은 '하지 말아야 할 정경유착'과 '해야 할 정경유착'을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앞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들어오고,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는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서도 기업을 지켜내고 크게 키워냈다.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전자의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해 세상의 주목을 받던 유일한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세상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소유한 유한양행 주식 전부를 유한중고교 재단에 기증하고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사업에 쓰도록 했다.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딸에게 준 묘지 일대 5000평과 학자금으로 쓰라고 손녀에게 건넨 1만 달러 이외의 재산은 사회에 다 환원했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라"가 자녀들에 대한 그의 유언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힘센 사람은 되기 쉽지만, 존경받는 어른은 되기 힘들다. 큰돈을 버는 과정에서 그런 어른이 될 기회를 잃기가 쉽다. 정당하게 벌었더라도 돈을 기반으로 존경을 얻는 것도 만만치 않다. 돈이 많은 재력가나 사업가보다는 돈이 없는 성직자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 첫머리에 인용됐듯이 '돈이 말을 많이 하면 진리가 침묵한다'는 격언도 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재력가나 사업가 중에 존경받는 어른이 거의 없는 것은 이들이 돈을 벌거나 쓰는 방식이 세상의 칭송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한은 큰 사업을 일으키고 큰돈을 벌었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 있다. 이는 그가 재산 전부를 사회에 되돌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의한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옳게 벌고 옳게 쓰는 기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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