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7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데이비드 퍼듀 신임 주중 미국 대사 취임 선서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남북전쟁 이후 남부 재건기의 군 개입을 반성하며 마련된 포세 코미타투스 법은, 군이 공권력의 보조 수단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는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주 방위군이라 해도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법의 정신과 충돌한다.
따라서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은 이 법을 직접적으로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헌법적 금기에 매우 근접한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는 "국가에 대한 반란의 위협이 있을 경우" 대통령이 주 방위군을 연방 차원에서 동원할 수 있도록 한 미국 연방법 제10편 제12406조 (10 U.S.C. § 12406)을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조항이 허용하는 상황의 해석 여지다. 이민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과연 국가 반란에 해당하는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동원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법의 틈을 활용해 군을 도심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군의 정치화가 위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도, 시민의 동의 없이 동원되는 군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 아렌트(Hannah Arendt)는 권력은 무력이 아닌, 시민 간의 합의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권력이 사라질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무력이다.
트럼프가 군에 의존한 이유는, 그의 권력이 시민의 동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실패는 무력을 호출하고, 그 무력은 언제나 시민을 향한다. 그리고 그 공백을 군이 메우는 순간, 시민은 적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계엄 모의가 좌절된 것은 대조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통해 정국을 장악하려 했지만, 헌법 절차, 국회의 견제, 무엇보다 시민들의 거대한 저항이 이를 막아섰다. 결과적으로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법이 아니라 시민의 정당성 부여 여부가 군의 작동을 가로막은 것이다. 군의 정당성은 명령이 아닌, 동의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법적 근거가 있다 해도, 시민이 그 정당성을 거부하는 순간 군은 멈출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 통제의 실질적 장치다.
군이란 기술적으로는 전투에 최적화된 조직 체계다. 그러나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언제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군은 자율적 윤리 체계와 계급 질서를 지닌 전문가 집단으로서, 국가가 외적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 '최후의 수단'이 정권 유지나 내부 불만 억제를 위해 동원되는 순간, 군의 전문성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한다. 이는 파시즘의 전형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 위기에도 반복되는 위험한 패턴이다. 군이 공공의 보호자가 아닌 통치의 도구가 되는 순간, 시민은 주권자가 아닌 통제 대상이 된다.
군이 광장을 마주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질식한다

▲지난해 12월 4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을 시도하자, 당직자와 보좌진들이 이를 막고 있다.
유성호
이 문제를 더욱 깊게 보면, 결국 '시민의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자유는 단지 국가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공권력의 사용에 대해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시위, 반대, 비판은 단지 사회적 소음이 아니라, 자유의 증표다. 그것은 통치에 대한 시민의 응답이며, 정치의 생명선을 구성한다. 군이 시위를 진압하는 순간, 국가는 자유를 침묵시키는 것이고, 시민은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된다. 이때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실질은 사라진다.
그렇기에 시민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어선은 총이 아니라, 제도와 참여, 그리고 판단이다.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주 켄트 주립대학교. 비무장 학생들이 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베트남 전쟁 확대에 항의하던 이들은 '내부의 적'이 아닌 단지 목소리를 낸 시민이었다. 군이 광장을 향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가장 깊은 상처를 입었다.
2025년 미국. 이번엔 캘리포니아에서 군이 다시 광장을 마주했다. 이민자 대규모 추방을 둘러싼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갈등 속에서, 주 방위군이 도심에 투입됐다. 법적 절차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곧 정당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군이 국경이 아닌 시민을 마주하는 순간, 그 존재 이유는 흔들린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시민과 제도의 저항으로 좌절됐고,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법이 아닌 정당성이 군을 막아 세운 것이다. 시민들은 국가를 향해 싸운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않도록 제어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군이 국경을 마주할 때, 국가는 지켜지고, 시민은 존중되며, 민주주의는 숨을 쉰다. 그러나 군이 광장을 마주할 때, 국가는 흔들리고, 시민은 위협받으며, 민주주의는 질식한다. 군은 누구를 마주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허락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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