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10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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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에 관련된 일을 정치권이 문제 삼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김민석 후보자는 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 실형을 받았다"라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총리직을 수행하며 한미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김문수 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지난 5일 대선 캠프 해단식에서 "아마 미국에서 굉장히 이걸 문제를 삼을 것"이라며 "그동안은 적당하게 넘어갔지만, 미국 정부가 자기 문화원을 점거한 이런 사건에 대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80년대 전반에 집중 발생한 미문화원 공격 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은 미국을 당황케 만드는 일일 수 있다.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1985년 5월 23일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의 공통점은 5·18 진상규명과 사과 촉구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자주 부각되면 미국이 곤란해질 수 있다.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환수(1994.12.1.)되기 이전인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벌인 일은 미국의 묵인 없이 불가능하다. 5·18 현장에 있었던 아놀드 피터슨 선교사는 미군의 시스템이 광주 현지에서 작동한 사실을 <5·18 광주사태>에서 증언했다.
체험록인 이 책에서 피터슨은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다음 날인 그해 5월 22일에 "송정리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서 일하고 있는 공군 하사인 데이브 힐이라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고 회고했다. 피터슨은 "그는 미 공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들어와서 양림동에 있는 미국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책에 썼다.
피터슨은 계엄군이 도청을 탈환하기 이틀 전인 25일에도 미군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미 공군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헬리콥터에 의한 미국인 구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통지한 사실을 증언했다. 이처럼 미군은 광주 현장과 무관치 않았다.
1980년대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이유
피터슨의 체험록에는 5·18과 미국의 관련성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 하나가 들어 있다. 한국군 최정예 부대이자 경기도 양평 주둔 부대인 육군 20사단이 어떻게 광주까지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언론보도를 근거로 "이 사단은 1980년 5월 16일에 미국 지휘하에 있는 한미연합사에서 탈퇴했었다"라며 "이 일은 위컴 대장이 협정에 따라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통보를 받고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피터슨 목사가 미군으로부터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필리핀 수빅만 기지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려 했었던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방향을 틀어 부산에 입항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예고한 그해 5월 24일 자 <매일경제> 'WP지 보도 미 항모 코럴시호 한국 수역에 출동'에 따르면, 23일 자 <워싱턴포스트>는 코럴시호의 한국 입항이 "한국 사태를 이용한 북괴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예비 조치"라고 전했다. 이 조치는 전두환이 북쪽을 염려하지 않고 남쪽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의 배려였다. 5·18 북한 개입설이 아니라 5·18 미국 개입설이 규명돼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0년대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5·18 미국 개입설을 명확히 확인하고 미국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김민석 후보자가 관련된 1985년 5월 23~26일의 점거·농성도 마찬가지다.
'광주' 등이 적힌 대형 전단이 문화원 2층 창문에 게시된 사진과 함께 발행된 그달 23일 자 <동아일보>는 "23일 정오경 서울 중구 을지로1가 미국문화원 건물에 1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일시에 들어가 2층 도서관 안에서 오후 2시 현재 농성을 벌이고 있다"라며 "이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왔는가',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등 2종의 유인물을 통해 광주사태를 묵인한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민 앞에 사과하라는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고 전했다.
당시 21세인 김민석 서울대 총학생회장 겸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은 문화원 바깥의 응원 집회장에 있었다. 1992년 2월호 <역사비평>에 기고한 '내가 겪은 사건: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서울대총학생회장 시절'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5월 23일 12시가 조금 지나, 농성 참가자들이 문화원 앞에서 숨을 죽이며 진입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서울의 동서남북 각 지역에서는 지역 내의 한 대학에 모여 전학련 주최의 연합집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부 지역에서는 숭실대에서 집회가 열렸다. 나 또한 집회에 참석하여 내심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집회가 진행되는 중 긴급 소식이 장내로 전해졌다. '서울 시내 5개 대학, 전학련 삼민투 소속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진입하여 농성에 들어갔답니다!' 순간 장내가 웅성거리고 곧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우리의 진입이 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달라"

▲1985년 5월 24일 대학생들이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며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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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비롯한 전학련 지도부가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쟁위원회) 학생들을 문화원에 파견한 것은 '5월 투쟁'의 일환이었다. 위 기고문은 "1980년대 전반기에는 매년 5월이 되면 광주사태라는 풀릴 수 없는 주제가 서서히 제기되기 시작"했다며 "이러던 것이 1985년에 들어서는 2·12총선에서의 신민당 돌풍으로 정세가 급진전되고 학생운동이 전국적 조직을 갖춤에 따라 본격적으로 5월 투쟁이 계획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기술한다.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진짜 동기인 5·18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엉뚱하게도 반미 이슈가 부각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취재기자들에게 이 점을 신신당부했다. 문화원 진입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학생들은 언론사와의 필담에서 "우리의 진입이 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학생들은 미국만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과 전두환 정권뿐 아니라 야당인 신민당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이들 여럿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면 미국 관청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여러 세력에 전하고자 했다는 점은 그들의 유인물에서 확인된다. 위 5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유인물에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의 진상과 그 책임자는 명백히 국민 앞에 공개돼야 한다. △광주사태의 주모자와 관련자들은 책임을 져라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민 앞에 정중히 사죄하라 △신민당은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고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고 주장했다."
김문수 전 후보나 권성동 원내대표 같은 이들은 미문화원 점거를 반미 사건으로 한정하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이 아니라 5·18이었다.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것은 5·18 미국 개입설을 확인하고 따지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5·18에 대해 원죄가 있다. 그래서 5·18 앞에서 움찔하는 나라다. 김문수 등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어두고 싶어 할 것이다. 미문화원 점거자들을 반미주의자로 몰아세워 이 이슈를 키우면 누구보다 불편한 것은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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