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14 11:45최종 업데이트 25.06.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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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찍은 고종의 모습.위키미디어 공용

'대행의 대행'의 국정 운영이 고종 임금 때 있었다. 지난해 12월 27일 대통령권한대행인 한덕수 총리가 탄핵 소추되고 최상목 부총리가 권한대행이 되자, '대행의 대행'이란 말이 회자됐다. 최상목 부총리는 한덕수 총리를 대행한 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을 대행했으므로, 이 경우에는 '대행의 대행'이란 말이 엄격히 들어맞지 않는다. 명실상부한 '대행의 대행'은 고종 때 있었다.

'대행의 대행'의 등장은 철종 임금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음력으로 철종 14년 12월 8일 자(양력 1864.1.16.) <철종실록>은 그날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인 묘시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철종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준다.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죽었다고 적힌 역사서적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이 많지만. 이는 실록 상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은 결과다. 철종이 1864년에 사망했으므로, 후임인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다는 서술 역시 오류다. 고종의 왕권이 '대행의 대행'으로 인해 제약을 받은 것은 1864년 이후의 일이다.

철종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철종시대의 대왕대비이자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배우자인 조 대비(신정왕후)는 철종의 7촌 조카뻘인 12세 고종을 신왕으로 지명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당시는 흥선군) 이하응도 있었고 고종의 형인 이재면(당시 19세)도 있었지만, 직계가 아닌 방계가 승계할 때는 나이 어린 미혼자가 유리했다. 여기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꼭두각시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조 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계산도 작용했다.

어린 군주가 등극했으므로 56세의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개시했다. 그런데 수렴청정권의 일부는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다. 대원군의 섭정권은 임금의 아버지라는 지위에서 발생하지 않고, 신정왕후의 권한 위임에 근거했다. '대행'인 조 대비의 위임에 의해 '대행의 대행'인 이하응이 권한을 갖게 됐던 것이다.

'대행의 시대'가 '대행의 대행의 시대'로 완전히 넘어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됐다. 1885년에 개화파(시장개방파)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흥선대원군 약전>은 "전권을 물려받은 것은 익년인 을축년에 대왕대비 조씨에게 권하여 경복궁을 중수(重修)한 때"라고 알려준다. 양력 1865년 1월 27일부터 시작된 음력 을축년에 조 대비의 권한 대부분이 이하응에게 사실상 넘어갔다는 언급이다.

수렴청정 끝났지만... 실권 잡지 못한 고종

조 대비가 수렴청정하고 대원군이 섭정하는 구도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격침되고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도발한 1866년에 종결됐다. 고종 즉위 2년 만인 1866년 3월 29일(음력 2.13)의 일이다. 음력으로 이 날짜 <고종실록>은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거두고 크고 작은 공무를 주상이 일체 총괄하라"는 조 대비의 교서를 들려준다.

그해에 고종은 14세였다. 훌륭한 군주로 평가되는 성종(연산군 아버지)은 19세까지 수렴청정을 받았고, 즉위 당시 유능하다는 평을 받은 선조는 16세까지, 고종의 전임인 철종은 23세까지 받았다. 수렴청정이 이례적으로 빨리 끝난 것은 조 대비가 교서에서 지적한 대로 고종의 학문과 업무능력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국정을 장악한 뒤라 수렴청정 종결 여부가 별다른 변수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렴청정 당시에 대원군의 권력은 조 대비의 위임에 따른 것이었다. 이 구도는 수렴청정의 종결과 고종의 친정(親政)에 의해 사라졌다. 대원군의 위상은 고종이 친히 국정을 맡은 이후에는 일반 실권자와 다를 바 없었다. 누군가의 위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정치력으로 형식상의 최고지도자를 제치고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이전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질 수도 있게 됐지만, 권력 유지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은 이전보다 약해졌다.

대원군의 권력이 제도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게 된 이 같은 상황 변화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인 쪽은 그의 아들이다. 고종은 틈만 나면 '임금은 저분이 아니라 바로 나다'라는 메시지를 표시했다. 그럴 때마다 조정 신하들은 애써 무시했다. 신하들은 '학문에 전념하소서'라는 말로 그 난감한 상황을 피해 갔다. 정치해야 할 사람한테 '공부나 하시라'고 독려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나마 친정이 개시된 지 6개월이 흘렀을 때다. 9월 2일(음력 7.24)에 제너럴셔먼호가 격침되고, 9월 20일(음력 8.12)에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에 침입해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이런 가운데 9월 26일(음력 8.18) 오후 5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신과 군영대장들이 참석한 이 회의의 주제는 경강(京江)에 출현한 이양선(異樣船)에 대한 대책 수립이었다.

한강에 출현한 서양 군함들에 대한 대책은 운현궁에 앉아 있는 대원군의 머릿속에 있었다. 대신과 대장들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고종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직무상 그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없어 참석했을 뿐이다. 그들은 회의를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주상 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음력으로 고종 3년 8월 18일 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위 어전회의에서 종1품인 판중추부사 조두순은 "수라와 침수는 물론 강학에 이르기까지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시는 게 백성을 진정시키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진언했다. 평소처럼 그냥 밥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열심히 공부하시는 것이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을 도와주는 길이라는 훈계였다.

고종의 생각은 달랐다. 외국 군대가 나라를 침공했고 자신은 나라의 군주이므로 자기가 대책을 세우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함께 논의해 줄 신하들이 없었다. 앞에 모인 신하들은 그의 아버지의 의중을 궁금해할 뿐이었다.

고종은 효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충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회수할 방안을 강구했다. '대행의 대행'이었다가 단독 실권자가 된 아버지를 끌어내리기 위해 그는 불효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가급적이면 아버지의 처가이자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에서 친위 세력을 찾아내 자기 주변에 배치했다. 이는 아버지 쪽의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이와 더불어, 형식적 친정을 실질적 친정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그가 참고한 것이 있다. 그것은 동맹국인 청나라의 상황이다. '백악관에서 이렇게 하더라'는 말이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서 힘을 발휘하듯이, 당시에는 '자금성에서 이렇게 하더라'가 힘을 가졌다.

당시 청나라 황제는 고종보다 3년 먼저 즉위한 네 살 연하의 목종이다. 그 시대 연호가 동치(同治)였다 하여 편의상 동치제로 불리는 그는 즉위 당시 5세였다. 그를 대신해 법적 어머니인 자안황태후(일명 동태후)와 생모인 자희황태후(서태후)와 삼촌인 공친왕이 공동 섭정을 했다.

고종이 그 셋 중에서 주목한 대상은 공친왕이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와 비슷한 처지인 공친왕의 동향을 주시했다. 공친왕은 초기에는 섭정단 서열 1위였다가 1865년을 계기로 서태후에 밀렸다. 고종 9년 4월 30일자(1872년 6월 5일)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신단 서열 3위와의 대화에서 공친왕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동치제의 친정을 응원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동치제의 위상은 1873년 2월 23일(음력 1.26)에 바뀌었다. 이때부터 형식상으로나마 친정을 하게 됐다. 고종은 동병상련의 대상인 동치제가 한 단계 도약한 일에서 자극을 받았다. 자기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승정원 등에 배치하고 대원군을 비판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아버지의 권력에 도전해 온 그는, 동치제가 친정한 그해에 신의 한 수를 뒀다. 그것은 면암 최익현 기용이다.

최익현 상소문 통해 대원군 실각시켜

청양 모덕사에 있는 '최익현 초상'연합뉴스

그해 11월 30일(음력 10.11), 고종은 반(反)대원군 진영의 핵심 인물인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기용했다. 당시 40세인 최익현은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같은 대원군의 주요 시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인해 대원군 쪽의 주목을 받던 인물이다. 이 시기의 최익현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동부승지직을 수락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런 최익현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정국 상황에 대한 그의 입장 표명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임명된 지 보름 뒤인 12월 14일(음 10.25), 최익현은 동부승지직을 고사하면서 정국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는 역사적인 상소를 올렸다. <면암선생문집> 제3권에 따르면, 이 상소에서 최익현은 집권세력을 싸잡아 비판하면서 "정의가 소멸"됐다고 탄식했다. 백성은 어육이 되고 윤리는 무너지고 사기는 막혔다고 논박했다.

이 상소는 대원군 진영을 자극했다. 그들은 최익현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들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종은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면암선생문집> 제1권에 따르면, 고종은 "정직한 말에 만약 이론(異論)을 하는 자가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최익현의 상소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소인배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듯 고종은 아버지 쪽 사람들을 소인배로 몰아 숙청하는 방법으로 아버지의 권력 기반을 흔들다가, 결국 흥선대원군마저 실각시켰다. 1873년 12월에 시작된 이 공세는 1874년에 완성됐다. 그의 불효는 완성됐고, 그는 명실상부한 군주가 됐다.

1864년에 '대행의 대행'으로 시작해 1865년에 전권을 위임받고 1866년에 단독 실권자가 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74년에 권력을 잃었다. 권불십년이었던 것이다. 그가 재집권한 것은 1882년에 임오군란 주역들이 그를 추대하면서다. 아들의 권력을 '권불팔년'으로 만들면서 재집권한 그는 임오군란 때는 아들이 불러들인 청나라군에 체포돼 한 달 만에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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