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한강공원에서 열린 서울시민리그 복싱대회
이현우
"낭만이다, 낭만."
"무슨 태국 같아."
사각 링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는 행인의 말이다. 지난 5월 31일 서울시 광진구 뚝섬한강공원에서 서울시민리그 생활복싱대회가 열렸다. 서울시민리그는 2015년부터 서울특별시와 서울특별시체육회가 주최하는 생활체육대회다. 프로선수나 실업선수가 아니면서 서울에 거주하거나 생활하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 올해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탁구, 복싱 등 총 11개 종목이다.
이번 복싱대회는 뚝섬한강공원 야외에 설치된 링에서 진행되었다. 여러 생활복싱대회에 참가해 봤지만 야외에서 복싱 시합을 하는 건 서울시민리그가 처음이었다. 회색빛 콘크리트 교량 기둥을 덮은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시합 링의 배경이다. 반대편으로는 사각 링 너머 한강이 보인다. 지나가는 행인의 말처럼 낭만 있는 대회다.
어느덧 내 시합이 다가왔다. 저벅저벅 계단에 올라 링 줄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공이 울리고 시합이 시작됐다. 공방이 오가던 찰나에 기회가 찾아와 카운터 스트레이트를 성공시켰고 주도권을 잡자 여유롭게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결국 복부 스트레이트 공격을 성공시키면서 1라운드 RSC(심판 중단 경기)로 승리했다. 최근 시합을 패배하기도 했고 RSC 승리는 처음이라 짜릿했다.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
이날은 복싱 링이 주무대가 아니었다. 같은 장소에서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와 부대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는 올해로 2회 차를 맞는 축제다. 철인 3종 경기(달리기, 자전거, 수영)를 변형한 축제로서 순위나 기록 경쟁 없이 완주를 목표로 한 체육 축제다. 사전 신청을 해야만 참여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기념 티셔츠를 입고 있어 한눈에 구별할 수 있었고 나들이 나온 시민들도 체험 부스를 돌아보며 축제를 즐겼다.
사격, 조정, 뉴스포츠 등을 체험하는 부스도 마련된 덕분에 새로운 스포츠 종목을 경험할 수 있었다. 뉴스포츠는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를 지향하며, 특히 장애인과 비장애인, 유소년층, 노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이날 경험했던 뉴스포츠는 후크볼이었다. 후크볼은 찍찍이 공을 던져 빙고를 맞추는 종목이다.
이 외에도 아웃도어, 식품 브랜드 등에서도 부스를 마련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며 경품을 제공했다. 각 체험 부스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해 있었다. 그러던 중 내 눈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었다.

▲서울 시민 체력장 부스에 붙어있던 홍보 포스터
이현우
"평소에 하던 분 아니면, 내년에 하세요."
"많이 다치십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뭐라고? 내년에 하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방금 생활복싱대회를 승리로 장식한 복싱인의 코털을 제대로 건드는 문구 아닌가. 문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보니 그곳은 바로 '시민 체력장'이었다.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체력장에 참여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혼자 참여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나이대와 점수 구간에 따라 참가 경품을 차등 지급했다. 에코백, 스포츠 타월, 음료+수첩+볼펜, 수첩+볼펜, 볼펜 순이었다. 승부욕은 더욱 불타올랐다. 목표는 스포츠 타월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의 두 번째 링에 들어선 것이다. 반드시 복싱인의 강인한 체력을 보여주리라.
이날 체력장 항목은 총 8개. 심폐지구력, 근력(악력, 배근력), 근지구력(윗몸일으키기, 풀업) 유연성, 반응시간, 순발력(제자리멀리뛰기, 서전트), 민첩성(사이드스텝), 파워. 악력과 배근력은 준비된 장치를 순간적으로 쥐고 잡아당기면 기록이 나왔다. 이때까지만 학창 시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체력장 분위기였다.
반드시 스포츠 타월을 손에 거머쥐리라

▲서울 시민 체력장 측정 항목과 상품 지급 기준
이현우
풀업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성은 매달리기 시간, 남성은 풀업 개수로 측정한다. 30대 남성은 12개 이상이어야 1등급이다. 옆에 측정하는 스태프가 반동을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반동 따위는 모르는 복싱인' 아닌가.
드디어 철봉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광배근과 팔을 사용해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개수가 늘어날수록 온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철봉 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해 발을 차올리며 상체를 철봉 위로 간신히 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옆에서 안전을 지도하며 개수를 측정하는 스태프가 '하나 더! 하나 더!'를 외치니 응원에 힘이 솟아 '악' 소리를 내며 몇 개를 더했고 총 17개를 했다. 영상을 다시 보니 무리라는 무리는 다 끌어다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상금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복싱인의 진가를 보여줄 순서가 다가왔다. 바로 사이드스텝이다. 좌우로 두 번씩 번갈아 스텝을 밟아 양 끝에 있는 테이프에 발이 닿으면 개수가 측정되었다.
'복싱은 발로 한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측정이 시작되자 볼품없었지만 복싱 훈련 때문인지 예상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덧 몸은 나름의 리듬을 유지하며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무리한 탓일까. 예전에 다쳤던 발목에 '찌릿' 통증이 느껴졌다. 측정을 마치자 스태프가 자기가 본 사람 중 최고라는 칭찬을 덧붙였다. 발목을 바칠 만한(?) 뿌듯한 칭찬이었다.
다음 코스인 윗몸일으키기도 표정이 일그러지든 말든 최선을 다했다. 함께 참여한 아내의 새로운 모습도 보게 되었다. 아내는 평소 운동을 즐기지 않기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나를 시도할 때부터 이미 20개 정도 시도한 사람처럼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마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바닥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와 스태프는 한 마음으로 '하나 더!'를 외쳤다. 이제 막 한 개를 성공했는데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진지하게 응원해 주는 스태프의 모습에 나와 아내는 웃음보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날 아내는 응원에 힘입어 윗몸일으키기 6개라는 대역사를 기록했다.
이후 제자리멀리뛰기와 서전트, 반응속도 측정으로 이어졌다. 서전트는 점프 후 체공시간이 측정되었고 반응속도는 불빛이 나오면 양발을 벌렸다가 오므리면 측정되었다. 사이드스텝의 여파일까. 발목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목표 점수에 다다르리라. 반드시 스포츠 타월을 손에 거머쥐리라.
추억을 가득 안겨준 서울 시민 체력장
▲서울 시민 체력장 평가 리포트
이현우
시민 체력장은 가히 생활체육판 '피지컬 100'이었다. 오히려 복싱할 때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악력과 서전트는 높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다른 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스포츠타월을 손에 쥐었고 매우 흡족했다. 체력장 기록표와 스포츠타월 하나가 이리도 큰 성취감을 주다니. 다만 부작용이 심했다. 이틀 동안 온몸에 가벼운 근육통을 앓았고 안쪽 복숭아뼈에 붉게 열감이 올라왔다.
일주일 내내 냉찜질과 마사지를 해주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지만 단순히 발목과 기록을 맞교환한 게 아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촬영한 영상을 되돌려보며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함께 곱씹을 추억을 저축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축제와 부대행사에 참여한 대다수의 시민들도 우리처럼 저마다 추억을 안고 돌아가지 않았을까.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와 서울 시민 체력장과 같은 생활체육 행사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서울 시민 체력장은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대신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는 서울 시민 체력장과 유사한 프로그램 '국민체력인증'을 운영하고 있다. 측정 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지만 측정 항목은 근력, 근지구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순발력으로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기회가 된다면 서울 시민 체력장이나 국민체력인증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기를 권한다. 매년 운동 목표를 세우고 실패했던 이들에게는 자극이 될 테다. 어떤 체력이 부족한지 진단할 수 있고 운동 방향도 설정할 수 있다. 친구, 가족, 연인과 함께 참여한다면 웃음과 추억은 덤이다. 당부할 것은 안전에 유의하면서 다치지 않게 즐기라는 점이다. 물론 막상 측정대 앞에 서면 불타오르는 승부욕을 통제하기 쉽진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