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11 06:35최종 업데이트 25.06.11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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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혁명의 시기에는 모두들 사이가 좋다."

윤석열 탄핵을 위해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던 지난 겨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농담처럼 했던 말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절박하고 한편으로 암담한 시기였다. 겨우겨우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선고는 예상한 시한을 계속 넘기고 있었다. 결론이 기각일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희망이 보여서 광장에 모였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광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나만 그러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고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를 박탈당한 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지난 겨울은 환희와 흥분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게 집회·시위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노를 원동력 삼아 거리로 뛰쳐나온다. 이는 주권자로서 가진 권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주장하고 행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대규모 군중과 함께 이를 행하는 건 희열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민주주의 위기라는 대규모의 위험 앞에선 평소에 우호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적대하던 세력도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정당과 정치 집단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투쟁에 나선다. 넘실거리는 다양한 색의 깃발 속에서 누군가는 생각했을지는 모른다. 내란 국면은 빨리 종식되어야겠지만 적어도 이 풍경만큼은 오래 보고 싶다고.

어제의 연대자들이 오늘의 경쟁자로

지난 4월 24일 무지개행동 주최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제21대 대선 성소수자 국정과제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유지영

물론 일이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문제가 된 권력자를 몰아낸 후 그 자리를 공백으로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빈자리를 채워야 하고 자신이 적임자라는 후보들이 속속 등장한다. 집권을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그래서 어제의 연대자들이 오늘은 경쟁자가 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전선이 형성되었다 무너지는 건 아쉬울 일이 아니다. 애초에 이념도 입장도 다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정치적 입장이나 신념에 따라, 심지어 때로는 경쟁에 있어 유불리를 계산한 결과에 따라, 어떤 의제는 공약에 담기지 않고 누군가의 주장또는 존재 자체가 철저히 배제되곤 한다. 아무리 그들이 지난 시간 같은 광장에서 함께 모였던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배제되는 이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일 확률이 높다.

겨우 지난주 일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지난 대선'이 된 21대 대통령 선거를 살펴보자. 정당에 따라 주요 후보자들의 공약에는 여러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여성과 소수자 정책에 있어서 원내정당의 후보자들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공통적이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 '낙태죄' 대체 입법 및 임신중단 접근성 강화 등의 여성 정책을 약속한 원내정당 후보는 없었다. 정책이 논쟁과 설화를 부를 것 같으면 몸을 사리는 모양새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지금 사회에 만연한 소수자 혐오와 배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생각을 밝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것이 향후 한국 사회 전반의 사회적 분위기를 가를 무척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들을 대변한 유일한 후보

지난 5월 16일 당시 제21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사에서 성소수자인권단체 모임인 '무지개 행동'과 정책협약식을 가졌다. 권 후보는 이 자리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공약을 재확인했다.민주노동당

물론 그런 후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외 진보 정당과 단체가 규합하여 선출한 이번 대선 유일의 진보 후보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표가 있었다. 권 대표는 앞서 언급한 성평등 주요 10대 과제를 모두 약속한 유일한 후보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하고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변경 절차 완화' 등 성소수자 인권 향상을 위한 제도를 공약에 담았다.

방송 토론회에서도 노선이 선명한 행보는 이어졌다. 당시 유력 당선주자였던 이재명 대통령에게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인지 질문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자 '영원히 못할 것 같다'고 비판했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권영국 대표는 나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유일한 후보였다.

물론 원외 정당 후보자라는 한계도 명확했다. 탄핵 전부터 유력 대선주자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린 타 후보와 달리 권영국 대표는 대중들에게 '정치 신인'에 가까웠다. 방송 토론회에서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권 대표는 대선후보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거기에 조직과 선거 자금의 규모도 다른 캠프에 비하면 확연히 작았다.

선거공보물도 한 장짜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불리한 조건은 결과로도 나타났다. 선거 결과 권영국 대표는 34만 4150표를 받아 0.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목표였던 3%를 넘지 못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거대양당이 총결집한 선거 구도에서 원외 정당이 목표한 득표를 하기는 어렵다.

0.98%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다

고 변희수 하사 대전현충원 안장 1년을 맞아 대전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는 지난 6일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고 변희수 하사 추모식'을 열었다.오마이뉴스 장재완

당선은 까마득하고 목표도 이루지 못할 걸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나는 권영국 대표에게 내 표를 주었다. 사실 기표소에 들어가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선거는 정치적 의사 표시이기도 하다. 이 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투표용지를 받고 후보자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를 대변하는 후보는 한 사람이었다.

혁명의 시기에는 모두들 사이가 좋다. 공통의 적이 있고 그 세력을 무너뜨려야 하는 목표가 있다. 하지만 혁명이 끝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 자리에 누가 앉을지 경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념에 따라 혹은 집권의 유불리에 따라 누군가의 권리와 주장은 무시되거나 혹은 버려진다. 어제까지 광장에서 함께 달리던 이들은 사라지고 소수자들은 다시 홀로 남는다. 이미 박근혜 탄핵 국면 때도 겪었던 일이다.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지난 5일, 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 등이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일주일 만에 철회되었다. 온라인상 혐오표현을 방송통신위원회가 심의 및 규율하도록 한 이 개정안에서 금지되는 차별·폭력 사유 중에는 '성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보수 개신교 집단에서 이를 문제 삼았다. 헌법에 따라 혐오에 맞서고 보편 인권을 지키는 게 정치인의 일일 텐데, 오히려 혐오를 수용하고 '성적 지향'을 빼기 위해 법안을 철회한 것이다.

그리고 한때 광장의 동료 시민이었던 이들 또한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항의하는 성소수자들에게 정부와 여당을 방해하지 말고 입을 다물라고 요구했다. 그 항의 또한 우리가 함께 행사했던 주권자의 권리일 텐데 말이다.

탄핵 국면을 지나 대선을 거쳐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이렇다. 그리고 이건 나와 같은 소수자 동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거나 상처에 재를 뿌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가 다수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수 속의 한 무리로 포함될 때도 있지만 소수자로서 우리는 늘 작고 외로웠고 하찮게 여겨졌다. 우리를 위해 나서줄 사람은 없다. 그 말은 우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환희의 시간을 지나 지금 마주한 상황이 쓰라려도 주저앉을 시간은 없다. 0.98%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출발해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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