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09 15:59최종 업데이트 25.06.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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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장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유세에 유세단이 5.18 깃발을 흔들고 있다.공동취재사진

1980년 6월은 전두환에게 도약의 달이었다. 5월 31일에 실질적 최고지도자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장이 된 그는 6월 한 달을 분주하게 보냈다. 6월 6일 오전 6시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호국영령들에게 머리 숙여 묵념한 그는 집권가도의 장애물들을 치우는 일에 그 한 달을 썼다. 그런 작업의 결과로 9월 1일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현충일 전날에 국보위 현판식을 연 그는 6월 12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국가기강 특별담화 발표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다음날에는 국보위가 사회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전면적 사회개조에 착수했고, 17일에는 이 기구가 민원실을 열었다.


18일에는 박정희 정권 2인자인 김종필을 비롯한 권력형 축재자들에 대한 수사 결과가 발표됐고, 이틀 뒤에는 공직자들을 겨냥한 숙정 작업이 개시됐다. 26일에는 위생불량업소 409곳에 대한 행정처분이 있었다.

전두환이 그 한 달을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 및 5·18 광주학살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뒀기 때문이다. 1980년 6월에 도약한 전두환의 군홧발에는 5월의 피가 묻어 있었다.

전두환이 추락하고 국민들이 승리했지만...

5월과 6월의 연관성은 7년 뒤 그에게 다시 나타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그달 29일에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한 것은 5·18과 연동된 일이었다.

전두환이 1987년 6월에 추락한 것은 직선제 개헌투쟁 및 박종철 고문치사 등과 더불어 5·18 제7주년 열기와도 연관된다. 6월항쟁 직전의 5·18 열기는 전두환 정권을 응징해야 할 당위성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이 항쟁이 1980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줬다.

늦봄 문익환 목사는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전남도청을 빼앗긴 1980년 5월 27일은 "꺾인 날"이 아니라 "시작한 날"이라고 평했다. 5·18 제6주년에 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5월 27일은 민중·민주항쟁이 꺾인 날이 아닙니다 / 피의 항쟁이 온 겨레의 가슴 가슴에 번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그날을 회고하며 / 추모사를 바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 당신이 죽었다고 조사를 바치려는 건 더욱 아닙니다 / 당신은 오늘의 싸움이요 내일의 승리입니다 / 온 겨레의 해방이요 지주입니다"

문익환은 1980년 5월의 기운이 1986년 당시에도 살아 있다고 썼다. 그런 기운을 타고 전두환 정권을 5월의 발 앞에 무릎 꿇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6년 전 당신이 그러셨듯이 / 군사독재의 연장을 꾀하는 모든 음모를 분쇄하면서 / 양코배기든 쪽발이든/ 군사독재와 한 패거리가 된 것들을 / 단호히 물리치면서 / 당신 발 앞에 무릎 꿇리면서 / 5월의 산천은 해마다 싱싱하게 더욱 푸르러 갑니다"

5월의 한(恨)이 1980년대 민주화투쟁을 견인하는 엔진이었다는 점은 문익환 등의 시뿐 아니라 1987년 6월항쟁의 현장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그해 5월 19일자 <조선일보> 11면은 "광주사태 7주년을 맞아 17일과 18일 전국 곳곳에서 추모제와 시위 및 성명이 잇따랐다"라며 "18일 하루 동안 62개대 2만 2천여 명의 학생들(경찰 집계)이 추모제 및 시위를 벌였고, 명동성당에서의 추모미사 등 종교단체·사회단체 등의 행사 및 시위가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런 뒤 "경찰은 갑호비상령을 내린 가운데 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전했다. 이 시기의 5·18 집회가 단순한 추모제가 아니라 반독재 저항운동이었다는 점은 "4만여" 경찰이 동원된 데서도 확인된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그날 오후 7시 30분부터 광주 남동성당에서 신도와 사제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미사를 열었다. 이 미사에서 발표된 '광주의거 7주기를 맞는 견해'라는 성명서는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정의의 확립은 집권자들의 선심이나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서 가능하다"라고 한 뒤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했다. 5·18과 직선제 투쟁이 한데 맞물려 6월항쟁의 추동력이 됐음을 보여주는 성명서다.

같은 신문 11면 하단에 따르면, 그날 고려대 학생회관 앞에 모인 6백여 명은 '광주민중항쟁계승주간 선포식 및 실천결의대회'를 열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등을 외쳤다. 같은 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의 1500여 명은 '광주항쟁 7주기 계승 실천주간 선포식'을 거행한 뒤 '광주는 살아 있다'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 열기는 5월 18일 하루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달 26일 자 <조선일보> 11면에 "서울시경은 25일 재야단체의 광주민중항쟁범국민추모대회와 관련, 파고다공원 앞 등 시위 현장에서 연행한 대학생-시민 등 1천 2백 84명 중 이종훈 등 대학생 6명을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라는 대목이 있다.

연행된 1284명 중에 일반 시민이 몇몇 끼어 있었다면, "대학생-시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일반인인 그들이 재야단체 운동가들이었다면, 구속 상황을 언론사에 알려주는 경찰이 그들의 신분을 일반 시민으로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권과 경찰은 반정부진영과 일반 시민들이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이 일반 시민들의 5·18 추모제 참석을 인정한 것은 5·18 열기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5·18과 6월항쟁이 한 몸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이 추락하고 국민들이 승리했다. 이는 6월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개정헌법에 5·18이 들어가는 게 당연함을 역설한다. 5·18이 6월항쟁의 공동 승자이므로 이 승자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쓰고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해 7월 4일 자 <동아일보> 6면 좌하단은 "5·18광주유족회·광주의거부상자회 등 31개 단체는 4일 '5·18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는 등의 3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라고 한 뒤, "이 성명은 또 새 헌법 전문에 '5·18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명문화해야 하고 기념사업·보상문제 등은 그 헌법 전문의 정신에 따라 조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전했다.

이런 요구에 따라 김대중과 김영삼의 평화민주당(민주당)은 5·18의 헌법 전문 수록을 추진했다. 7월 9일 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민주당은 8일 하오 외교구락부에서 헌법개정안 작성특위를 열고 개헌안 전문에 정치보복 금지 선언과 5·18광주사태 이념을 반영키로 하는 개헌안 작성요강을 마련했다"라고 보도했다.

현행 헌법에도 전두환과 민정당의 관점 반영돼

1985년 10월 3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한 전두환과 이순자연합뉴스

그러나 민정당은 딴지를 걸었다. 역사책 쓰자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7월 30일 자 <경향신문> 3면에 따르면, 민정당 헌법특위 위원장인 김숙현 의원은 "5·18 사건은 한 지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폄하한 뒤 "지역적 사건을 따져 넣으려면 차라리 청산리대첩이나 신의주 학생반공의거도 넣어야 한다는 얘기도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역사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사건을 전문에 나열식으로 넣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역사책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민주당 내부의 반론도 5·18 헌법 수록을 막는 원인이 됐다. 3년 뒤 민정당과 3당 합당을 하게 될 민주당 상도동계의 태도 변화도 변수가 됐다. 그해 7월 15일자 <경향신문> 1면은 김대중계와 김영삼계가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면서 "의총에서 상도동 측은 개헌안 시안의 전문에 삽입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과 '5·18 광주의거' 등 구체적 사항 등은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있어서 민주화를 다짐하는 현 시국상황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이 부분의 재검토를 요구했다"라고 전했다.

상도동계의 배신도 원인이 됐지만, 다수 의석을 가진 민정당의 반대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집권 여당의 반대는 상도동계가 생각을 굽히도록 만든 원인이다. 5·18이 헌법 전문에 실리면 더 이상 기를 펼 수 없는 전두환과 민정당의 훼방이 최대 요인이었다.

5·18은 직선제 개헌 요구와 더불어 6월항쟁을 이룩한 원동력이다. 1980년 이후로 지속된 5·18 열기가 6월항쟁의 열기로 흡수됐다. 6월항쟁의 결과로 현행 헌법이 탄생했으므로, 6월항쟁을 추동한 5·18이 현행 헌법에 규정돼 있어야 마땅하다.

현행 헌법은 제67조 제1항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고 규정함으로써 6월항쟁 당시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반영했다. 그러나 5·18에 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다.

5·18이 현행 헌법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전두환과 민정당의 관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는 5·18과 공존할 수 없는 전두환의 망령이 현행 헌법 내에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헌법을 이 상태로 두는 것은 흉측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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