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뉴저지주 모리스타운공항에서 기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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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동맹국을 지키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
최근 맬컴 턴불 전 호주 총리가 외교전문매체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는 선언이다. 미국 중심의 전후 질서가 해체되고 있는 오늘, 동맹국들은 '우정'이 아닌 '이익' 위에 외교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다.
2025년 6월,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 외교무대의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그는 조만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며 이미 미국과의 첫 정상 통화를 마쳤다. 취임 초기의 외교 행보는 단순한 의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국제 환경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향후 수년간의 전략적 지형을 규정할 정도로 긴박하다.
가장 주목되는 상대는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며, 그의 외교 노선은 첫 임기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한미동맹이 여전히 그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공동의 가치가 아니라 철저히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한국이 마주한 외교적 과제는 단순히 예의와 신뢰를 지키는 것을 넘어, 시대 변화에 맞는 외교 전략을 능동적으로 새로 짜는 일이다. 우리는 '동맹은 신뢰로 작동한다'는 말에 익숙하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동맹을 신뢰가 아닌 거래의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계의 경찰'에서 '정글의 지배자'로
무엇보다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미국 내 헌정 질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연방의회, 사법부, 독립기관에 대한 압박을 노골화하고 있다. 대통령령과 비상명령을 통해 입법 기능을 우회하며, 정치적 충성도를 기준으로 주요 요직을 교체하고 있다. 2025년 초부터 진행된 연방대법원 개편 논쟁은 그 전형적 사례다.
입법·사법·행정이 상호 견제하며 작동하던 삼권분립이 지금 미국에서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헌정 쿠데타의 점진적 진행'이라 부른다. 미국은 지금, 우리가 오랫동안 이상적으로 바라보던 자유민주주의의 원형이 아니다. 구조가 흔들리는 거대한 선진국일 뿐이다.
둘째, 미국의 재정 상황은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25년 현재 연방정부의 연간 이자 비용만 1조 달러를 초과하며, 이는 국방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다. 모건스탠리와 JP모건은 "미국의 부채가 2027년까지 금융 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지금의 부채 위기는 과거와 달리 정치적 시간표가 빠듯하다"고 분석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지금의 미국은 군사력이나 달러 패권으로 세계를 압박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로를 걷고 있다. 과거의 미국이 '강하면서도 이성적'이었다면, 오늘의 미국은 '강하지만 자기파괴적'이다. 이 점은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 가장 중대한 전략 포인트다.
셋째, 통상정책에서도 미국은 스스로를 해치는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알루미늄·철강 관세는 그 직접적인 예다. 캐나다산 원자재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서 미 제조업의 생산 비용이 상승했고, 이는 다시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키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우방국들은 이 조치를 '경제적 배신'으로 해석했고, 그 결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같은 미국 배제 다자무역 질서가 본격화되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를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거래 외교'를 밀어붙이며,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문제는 이런 외교가 단지 다른 나라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통상의 기본 원리인 비교우위를 무시한 채, 강압적 수단을 남발하면 결국 시장은 미국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넷째, 미국은 자신이 만들어온 전후 국제규범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 파리기후협정, 세계보건기구,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 탈퇴는 단순한 정치 제스처가 아니라, 제도적 리더십 포기의 신호다. 이는 단지 '세계의 경찰'이라는 역할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규범의 수호자에서 '정글의 지배자'로 스스로를 전환하는 선언이다.
한국 외교의 자립을 위한 유일한 길

▲이재명 대통령이 6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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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미동맹을 신뢰와 헌신의 문제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그런 접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은 '미국이 보호해야 할 약소국'이 아니라, '더 많은 방위비를 부담하고 미국산 무기를 사야 하는 부유한 동맹국'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신뢰가 아니라 거래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미국이 신뢰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래의 테이블 위에서 우리 몫을 확보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에 기대어선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우리를 돕는 것이 미국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드는 실용적 전략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외교 기술은 '상대의 약점을 읽고 기민하게 협상하는 능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충성에 신뢰를 주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조건에서만 움직인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는 '우리가 미국에 어떤 전략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기존 외교 관료 시스템은 이러한 전환에 익숙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외교는 주로 워싱턴 외곽의 싱크탱크와 공화·민주 양당의 인맥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한미동맹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에서는 그런 접근이 무력하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의 관성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계 유지형 외교'가 아니라 '관계 전환형 외교'다. 대통령의 외교 데뷔 무대가 G7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G7에서 디지털 무역 규범이나 글로벌 기술 협약 분야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을 수 있다. 또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구상에 참여하되 유럽이나 중견국과 공동 입장을 통해 주권적 이해를 함께 지켜나가는 시도를 할 수 있다.
또한, 통상 문제에서 미국의 일방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들을 국제무대에서 지지하고, 중견국 연합체로서의 발언권을 높이는 전략도 필요하다. 이는 반미가 아니라, 미국조차 스스로 파괴되지 않도록 돕는 전략이다. 미국이 더 강한 동맹이 되려면, 비판적 동맹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미국 중심 질서에의 종속'이 아니라, '국제 질서 속에서의 자율'이다. 이 자율은 충돌이 아니라 균형과 조율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중견국 외교의 미덕이다.
이재명 정부는 취임과 동시에 커다란 국제질서의 변화 앞에 서 있다. 외교무대의 첫 발걸음이 관성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그 길은 외롭고 위험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이 한국 외교의 자립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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