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의원에 수액 광고가 붙어있다.
HSC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한국 의료는 앞의 방향과 거리가 멀다. 한국 사회는 쉬지 않고 달릴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의료도 그에 맞춰 '빨리 낫게 해주는 것'이 중심이 된다. 아파도 쉬지 못하는 사회, 노동자들은 아무리 아파도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병원을 찾고, 병원은 기꺼이 '수액'을 내준다.
의료만 특별히 비틀린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상해 보이는 이런 의료도 한국 사회의 요구에 의료가 스스로를 맞춘 결과다. 아파도 쉴 수 없고,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의료는 속도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산업이 되기 마련이다. 병원 곳곳에 의학적으로는 효능이 없어 보험이 되지 않는 '영양수액' 광고 포스터가 붙고, 환자들에게 이를 권하는 풍조 역시 사회적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공백은 치명적이다. 대형 병원의 자기공명영상진단(MRI) 장비는 밤낮없이 돌아가지만, 농촌의 할머니는 요실금 때문에 한밤중에 시린 무릎을 끌고 화장실을 다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을 돌봐줄 의료는 없다. 의료를 상품으로 보는 상황은 이런 불균형을 더 심화시켰다. 대형 병원의 한쪽에서는 최첨단 장비를 자랑하면서, 다른 병동에서는 단순한 욕창 때문에 고통받는 노인이 방치된다. 동네 의원은 감기 처방으로 바쁜 와중에, 만성질환자가 최대한 약을 조금만 먹을 수 있도록 처방전을 조정하는 일은 흔히 방치된다.
검진센터는 무증상자에게 고가 검진을 권하지만, 비싼 검진을 받지 않는 초기 치매 환자에게는 해 줄 것이 없다. 증상과 필요를 입력하면 의사만큼이나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어놓는 인공지능(AI)의 등장에 대한 기대도 비슷한 맥락을 담고 있다. 의료가 적절한 시기 병원에 스스로 나타나 자신의 증상과 건강의 문제를 충실하게 말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처방을 판매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의사보다 AI가 더 친절하고 유능할지 모른다.
이 모든 왜곡은 우연이 아니다. 의료는 사회가 요구한 모습으로, 그리고 우리 사회에 익숙한 모양으로 발달해 온 것뿐이다.
의료의 본질을 되찾으려면
의료는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도구다. 하지만 이 성취에 취해, 의료인도, 사회도 의료가 '고통을 줄이는 기술'이라는 본질을 잊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의료라고 하면 기계로 가득한 병원과 바쁘게 뛰는 의사, 의학 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린다. AI가 의료를 혁신할 것이라는 전망도, 결국 또 하나의 '기술 중심 해법'일 뿐이다. 문제는 의료를 어디에 쓰고자 하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할 것인가다.
'의료(醫療)'라는 단어를 다시 보자. 의(醫)는 앓는 사람(殹)을 술(酒)로 치료하는 것을, 료(療)는 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疒)의 병을 태워버린다(尞)는 뜻이다. 술이든, 불이든, 고통을 덜고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의료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약이나 검사가 아니다. 서로의 삶을 돌보는 의료, 충분한 설명과 공감으로 환자가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의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료다.
'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연재는 이제 마지막에 다다랐다. 우리는 의료가 죽고 사는 문제를 좌우한다는 환상을 벗기고, 그 너머의 역할을 조명하려 했다. 한국 사람들이 누리게 된 긴 기대수명을 설명한 지난 글은 이렇게 끝났다.
의료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예상보다 역할이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는다. 그렇다면 "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이 시리즈의 질문 역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의료는 어떻게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말하고자 한 결론은 단순하다. 의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이 어디를 향할지는, 특정 전문가나 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다.
> 건강사회구락부(Health Socialist Club) 연재 보기: 의사들은 모르는 건강의 비밀(
https://omn.kr/2c5kj)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