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4일 서울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내 만춘전(萬春殿) 앞에서 열린 제3회 퇴계 선생 귀향길 걷기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개막식을 마친 참가자들이 도포와 갓을 차려입고 출발해 경복궁 광화문 앞을 지나고 있다. 선조는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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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8년간의 정권교체들 중에서 정치사뿐 아니라 사회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띠는 것이 있다. 단순한 정파 교체로 끝나지 않고 지배층 교체로까지 귀결된 사건이다. 임진왜란 25년 전인 1567년 8월 7일(음력 7.3) 선조 임금의 즉위는 그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정권교체다.
선조 개인만 놓고 보면, 그의 즉위는 약체 군주의 출현이었다. 선조는 선왕인 명종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이 낳은 덕흥군이라는 서자의 아들이었다. 광해군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왕의 서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설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선조는 '왕의 서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의 서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역사적인 지배층 교체를 수반했다. 이는 낡은 지배층인 훈구파가 퇴장하고 신진 지배층인 사림파가 역사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훈구파→사림파로 넘어간 조선의 권력
그 이전 시대를 주도한 훈구파는 1392년 건국 이후의 주요 정변들에서 공로를 세워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수도권에 기반을 둔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이것이 훈구파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반면, 유림세력인 사림파는 정변보다는 성리학적 교양을 기초로 과거시험 급제나 학문적 명성을 성취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들의 '지역구'는 주로 지방이었다. 부동산 보유 규모로 보면, 일반적으로 중소 지주였다.
일반 대중이 볼 때는 훈구파는 물론이고 사림파도 딴 세상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훈구파에 비하면 사림파가 상대적으로 건전했다. 사림파는 절차를 중시하고 도(道)를 따졌다. 대토지 소유를 견제했기 때문에 경제정의 측면에서도 비교적 깨끗했다. 선비 출신 관료들이 겉으로라도 항상 청빈한 삶을 표방한 것은 사림파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라이벌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사림파는 선조 즉위 훨씬 전인 1516년부터 1519년까지의 기간에도 집권한 일이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중종이 34세의 신진 관료인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예상외로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다가 훈구파는 물론이고 왕권까지 위협할 조짐이 있다고 판단되자 중종은 조광조를 전격 숙청하고 처형했다.
1516년의 사림파 집권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이에 비해 1567년의 집권은 사실상의 영구 집권이었다. 그 뒤 훈구파는 도태되고 사림파가 300여 년간 왕조를 주도했다.
숙적 훈구파를 물리친 사림파는 승자들의 일반 패턴에 따라 내부적인 세포분열에 돌입했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고 다시 남인·북인과 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이들의 당쟁은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로 인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로 특정 노론당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변질됐다. 이것이 국가 시스템을 약화시키면서 조선왕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훈구파의 퇴장과 사림파의 집권을 낳은 1567년의 지배층 교체는 선조 등극 2년 전인 1565년 5월 5일(음력 4.6)부터 본격화됐다. 이날 대비인 문정왕후가 죽자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지지 기반인 훈구파를 지우는 데 착수했다. 이것이 역사적인 정권교체의 출발점이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압박을 받다가 집권 9개월 만에 서른 살 나이로 사망한 이복형 인종을 이어 1545년에 임금이 됐다. 이때 11세였던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155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정권을 놓지 않았다. 위 날짜에 해당하는 음력으로 명종 20년 4월 6일 자 <명종실록>에 따르면, 살아생전에 문정왕후는 국정운영에 의욕을 보이는 아들에게 "내가 없었다면 네가 무슨 수로 이렇게 됐겠느냐?"라며 아들의 의욕을 꺾었다.
아들을 자기 자아실현의 도구로 생각하는 '엄모시하'에서 20년간 허수아비왕으로 지낸 명종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어머니 시대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그의 정치는 어머니의 지지자들인 훈구파 윤원형 등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사림파를 앉히는 개혁의 양상을 띠었다. 어머니 시대를 확실히 청산하는 길은 조광조 실각 이후로 훈구파의 박해를 받은 사림파를 조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정왕후의 국정운영은 훈구파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낡은 정치였지만, 보우대사를 비롯한 불교세력과 공조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성을 띠었다. 그것은 종교적·사상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치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부정하는 명종의 정치는 훈구파를 배척하고 사림파를 기용하는 개혁의 의미를 띠는 동시에, 불교세력을 약화시키고 유교원리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수구의 의미를 함께 띠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주로 전자의 측면에 주목하지만, 유교 선비들인 사림파를 중용하는 명종의 개혁으로 인해 사상적 다양상이 퇴보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즉위 20년 만에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 사림파 중용책을 펼친 명종은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감기에 잘 걸리고 추위를 많이 타는 약골 체질의 소유자였다. 양력으로 1557년 11월 17일 상황을 보여주는 명종 12년 10월 27일 자 <명종실록>을 보면, 23세 된 명종을 위해 대궐 건물의 처마 밑에 털가죽 휘장까지 쳤음을 알 수 있다. 양력 11월쯤 되면 자기 몸뿐 아니라 건물에까지 '파카 점퍼'를 입혀야 했다.
사림파, 알고 보면 경제정의 추구한 개혁세력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도산서원의 현판 (촬영 정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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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상체는 열이 나고 하체는 차가운 심열증도 앓았다. 체내 순환이 원활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어머니와 권력투쟁을 벌이고 유일한 후계자인 순회세자를 잃은 데 이어, 재위 20년 만에 상복을 입고 모친상을 치르는 바람에 그의 건강은 더욱 약해졌다. 약골 체질을 안고 훈구파 숙청에 나선 명종은 이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채 1567년 8월 2일(음력 6.28)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난 이 상황을 활용해 사림파 집권에 가속도를 붙인 인물이 2년 전에 영의정이 된 이준경(1499~1572)이다. 조광조의 제자인 그는 명종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를 압박해 사림파가 선호하는 하성군이 차기 주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선조시대 역사를 약술한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편에 따르면, 죽기 전에 명종은 잠재적 대권 후보인 네 명의 왕족을 불러 이것저것 가르친 일이 있다. 넷 중에서 가장 어린 왕족이 하성군(훗날의 선조)이었다.
명종은 "너희의 머리가 큰지 작은지 알아보려 한다"면서 자신이 쓰는 익선관을 네 후보에게 건넸다. 하원군·하릉군·풍산군은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았지만, 10대 초반인 하성군은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이를 보고 명종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명종이 하성군을 특별히 여긴 것은 사실이지만, 후계자로 지명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일은 없다. 하지만, 이준경을 위시한 사림파는 인순왕후를 압박해 15세의 하성군이 추대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임금이 된 선조는 지지자들의 은혜에 결초보은했다. 명종의 뜻을 이어 훈구파 숙청을 가속화하고, 사림파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또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훈구파 정권하에서 핍박받은 선비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또 당시의 사림파 지도자인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대우했다. 이로 인해 선조가 즉위한 지 6년 정도 되는 시점에는 훈구파의 퇴장이 대략 마무리됐다.
훗날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쫓겨 계속 도피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나빠졌다. 그러나 즉위 당시만 해도 그는 개혁세력의 집권을 가능케 한 역사적인 군주였다.
그의 동지들인 사림파는 나중에는 보수화되고 부패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싱싱하고 건강했다. 유교철학인 성리학을 연구한 이 세력은 대토지 소유자들을 견제하고 경제정의를 추구했다. 또 국정운영의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했다.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과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보유한 철학자 집단이 300여 년간 정권을 유지한 일은 세계사적으로 드물다. 사림파는 세계사에 등장한 가장 유능한 학자 집단 중 하나다. 문정왕후 사망 이후에 명종과 선조가 벌인 권력투쟁이 이런 그룹이 수백 년 동안 집권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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