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옹 김창숙
위키미디어 공용
심산 김창숙은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의 대명사다. 의원내각제 대통령을 뽑는 1960년 8월 12일 대선에서 그가 윤보선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같은 입후보 절차가 없었던 그 선거에서, 상·하원 국회의원 259명 중 29명이 81세인 김창숙의 이름을 써넣었다. 전형적 선비인 그가 뜻밖의 2위를 기록한 것을 두고 그달 13일 자 <동아일보>는 "홀연히 나타난 김창숙옹 29표", "신·구 양파에 끔찍한 충격",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이날 튀어나온 29표"라는 표현을 썼다.
4·19혁명 뒤의 7·29 총선에서 참의원·민의원 도합 202석을 얻은 민주당이 압도적 제1당이 되고 이로 인해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대결을 중심으로 정계구도가 재편되던 때였다. 이런 시점에 무소속 의원들이 김창숙 카드를 내밀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 때문에 세상은 "끔찍한 충격"을 받았다. 너무 큰 인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정치의 중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보적 이념과 거리 뒀지만... 독립운동은 함께한 이유
김창숙은 분단선거라는 이유로 1948년 5·10 총선을 거부했다. 그런 그가 분단이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무소속 의원들이 표를 던진 것은 그의 꼿꼿함을 국민들이 존경하고 있으며 이런 이미지를 활용하면 정치적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조동수 연세대 의대 학장은 그달 27일 자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고령자를 추대한 것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김창숙 선생을 추대한 것은 그분의 지조와 인격을 존경함이요"라고 말했다.
그처럼 꼿꼿함의 이미지로 세상의 존경을 받은 김창숙이지만, 그의 꼿꼿함은 이념과 행동의 일치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고비 때마다 자신의 이념과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곤 했다. 그의 꼿꼿함은 이념과 행동의 불일치에 기초한 것이었다.
1879년에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출생한 김창숙은 40세 때인 3·1운동 직후에 선비 137명이 서명한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의 주역이다. 이를 계기로 그가 전국적 지도자로 떠오른 1920년대에는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 기준에 의하면 그는 좌도, 진보도 아니었다.
그는 1951년경에 쓴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무정부주의(아나키즘)·공산주의·민족주의로 분열된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진영을 회고하면서 "사사건건 반목하여 드디어 동족상잔의 큰 화근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드러냈다.
"그 무렵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어 별도로 기치를 세웠으니 이을규·이정규·유자명·유림·정화암·백정기 등이 그러하였다. 나는 비록 저들 각파의 사람들과 접촉도 하고, 마르크스·레닌·바쿠닌·크로포트킨 등 제가(諸家)의 학설도 읽어보았으나, 전혀 취미가 붙지 않았다."
그는 위와 같이 진영 대립이 동족상잔의 화근이라면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는 "전혀 취미가 붙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런 뒤 "저들 각파가 당을 만들고 기치를 올리는데,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또 그는 192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유행을 지적하면서 "노숙한 사람들 중에도 물든 이가 많았으니, 이동휘·여운형·안병찬·김두봉 등이 그러했다"고 기술했다. '물들다'라는 표현은 진보적 이념에 대한 그의 시각을 반영한다.
김창숙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자 가문이었다. 그가 남긴 '아버지 하강공(下岡公)의 유사(遺事)'라는 글에 따르면, 그의 집안에는 "하녀와 하인들"이 있었다. 또 지역 유지인 아버지는 유력자들과 협력해 월천서당을 세웠다. 그가 진보적 이념들과 거리를 둔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김창숙 같은 경제·사회적 환경과 이념을 가진 인물들은 대개 다 보수 노선을 걸었다. 독립운동 때도 그랬고 해방 이후에도 그랬다. 그런데 김창숙은 그런 '문법'에서 벗어났다. 무언가가 옳다 싶으면, 자신의 환경과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옳다 싶은 방향을 향해 무조건 내달렸다. 그의 꼿꼿함은 이념에 대한 꼿꼿함이 아니라 옳은 것에 대한 꼿꼿함이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무정부주의자들과 협력했다.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약산 김원봉 등과 함께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1926.12.28)에 관여했다. 그의 동지는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옳은 것을 향한' 김창숙의 투쟁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에 있는 김창숙 동상.
김종성
그 직후에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집하다가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된 그는 14년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최고 형량이 3년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긴 형량이다. 동양척식을 폭파하려 한 데다가 지금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받은 결과다. 여기다가 일본 법률에 따른 변호를 받지 않겠다며 변호인의 조력을 거부한 것도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받은 고문의 후유중으로 그는 하반신이 마비됐다. 회고록 제목에 발족(足)이 포함된 벽(躄)이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벽옹으로 불렀다. 1929년 5월, 일제는 두 다리가 마비된 그에 대해 형집행정지결정을 내렸다.
진보적 이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진보적인 사람들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불구의 몸이 된 그는 해방 직전에도 그들과 손을 잡았다. 그가 '머리가 물든 인물'로 평가한 몽양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 활동에도 참여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7권 손학익 편은 손학익이 "여운형과 김창숙의 지시를 받고 건국동맹의 지하조직 결성에 힘쓰는" 인물이 된 일을 소개한다.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동맹에 참여한 일은 옳은 일을 위해 누구와도 함께했던 김창숙의 면모를 보여준다.
건국동맹의 중심인물인 여운형은 이 조직과 관련해서는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창숙은 이 때문에 해방 8일 전에 붙들렸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8일간마저 고생했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 틈에 들어가 운동을 할 때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특성으로 초래된 결과다.
김창숙과 이념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해방 뒤에 남북분단을 받아들였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창숙은 해방 뒤에도 항상 옳은 길만 걸었다.
국제연합 소총회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의(2.26)한 뒤인 1948년 3월 12일, 김창숙은 김규식·김구·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와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의 <경향신문>에 따르면, 김창숙 등은 분단이 임박한 현실에 우려를 표한 뒤, "백해(百害)만 있고 일리(一利) 없다"라며 "반쪽이 먼저 독립하고 남어지를 통일한다는 것은 다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유엔 결정을 비판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참여를 거부했다.
이때의 심경을 보여주는 시가 <심산유고>에 수록된 '김유신'이다. 시인은 "당시의 동족상쟁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에/ 떼어주었네"라며 "이보다 한스러운 것/ 또 어디 있을까"라고 탄식했다. 눈앞에서 현실화되는 분단이 외국 군대의 영구 점령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였다.
옳은 것을 향한 김창숙의 투쟁은 한국전쟁 중에도 계속됐다. 이승만이 민간인 학살 사건인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을 일으켜 애꿎은 국민들을 희생시키자, 그는 1951년 봄에 이승만을 상대로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승만은 전쟁 중인 이듬해 5월에 장기집권을 위한 비상계엄을 발포했다. 여소야대 때문에 국회 간선제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던 그는 계엄을 선포하고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김창숙은 이 역시 좌시하지 않았다. 전시상황에 비상계엄까지 겹쳐 이승만의 권력이 배가된 그 상황에서도 6월 20일의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에 참여했다.
그날 부산 국제구락부에 마련된 선언식 행사장에는 벽돌과 각목을 든 괴한들이 난입했고, 하반신을 쓸 수 없는 김창숙은 제대로 피신하지 못해 피를 흘리며 주저앉았다. 테러가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독재자의 친위 쿠데타를 묵인할 수 없어 벽옹의 몸을 이끌고 투쟁 현장에 나선 결과다. 그렇게 살다가 1962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은 세상의 명운이 걸린 기로에서 자신의 환경과 이념에 구속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얽매여 현명한 선택을 내릴 기회를 잃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위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의 실천을 위해 온몸을 내던진 꼿꼿한 어른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