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통령 시절의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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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당시의 부통령인 독립운동가 이시영(1869~1953)은 을사늑약 때의 외부(外部) 교섭국장이다. 1905년 11월에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으려 하자, 36세의 이 교섭국장은 열한 살 많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단단히 경고를 했다. 신주백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 쓴 <이시영>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위기를 느낀 이시영은 박제순에게 '이 조약은 우리 국가의 주권을 없애는 것이며 망국멸족의 장본이라. 대화(大禍)가 닥쳐올 것이니, 외부대신으로서는 마땅히 결사적으로 이를 반대하고 국시를 엄수하여야 될 것이다. 만약에 일시적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국가대사를 그르친다면 이는 만세죄역이 될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외부대신이 망국 직전에 비장하고 참혹하게 당한 사례를 들어 박제순의 마음을 단단하게 붙들려 하였다."
이시영은 상관인 박제순을 하급자처럼 대하며 계속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박제순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완용·권중현·이근택·이지용과 함께 을사오적이 됐다. 위 책은 "11월 18일 조약 전문을 확인한 이시영은 박제순을 통렬히 비판하고 교섭국장을 사임하였다"라며 "자신의 조카와 박제순 딸의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고 그와 절교하였다"고 기술한다.
대통령을 꾸짖은 부통령
이시영은 우당 이회영(1867~1932)의 동생이자 6형제 중의 다섯째다. 이 집안은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렸다. '남북한' 대신 '삼한'으로 한민족이 통칭되던 시절에 그의 집안은 한국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 가문은 이시영의 10대조인 오성 이항복 때부터 딱 한 대를 빼고 매번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그 과정에서 재상도 많이 배출됐다. 이시영의 아버지는 장관급이었고, 그의 대에서도 관찰사·재판소장·판사·참판 등이 나왔다.
일제의 핍박은 일반 대중을 겨냥했다. 일본은 지주나 양반층과는 어떻게든 협력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은 이시영 가문에 큰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집안은 일본과의 제휴를 거부하고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중국으로 집단 망명했다.
이 가문의 망명자들은 이시영 6형제를 비롯해 총 59명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모은 재산은 이들의 항일투쟁 자금이 됐고, 약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로도 유입됐다. 그것을 밑천으로 이시영은 3·1운동의 결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끝내 지켜내는 데 기여했다.
이시영은 보수우파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가 임시정부 활동 중에 참여한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은 우파 세력이었다. 이는 그가 해방 뒤에 남북분단을 받아들이고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밑바탕이 됐다. 그 결과, 그는 1948년 7월 20일 정·부통령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부통령이 된 그는 을사늑약 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잘못된 길을 가는 직속상관을 하급자 다루듯이 꾸짖는 모습이 79세 이후의 이시영에게서도 나타났다.
이시영은 1949년 6월 26일에 발생한 김구 암살 사건의 관련자로 이승만의 측근을 지목했다. 이시영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연루됐다고 믿었다. 1974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제215회는 이시영의 측근이자 전 국회의원인 이상돈의 증언을 소개한다.
"이상돈 씨에 의하면, 이 부통령은 특히 신성모를 백범 암살 관련자로 지목하고 이 대통령에게 그의 파면을 요구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성모를 총애하는 데 반발, 여러 차례나 충돌을 빚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측근을 암살 관련자로 지목하고 파면을 요구한 것은 이승만의 죄를 묻는 의미가 강했다. 이 과정에서 이시영은 6년 젊은 대통령과 충돌했다. 부통령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승만은 자리 욕심이 많았다. 자신이 앉을 자리뿐 아니라 지인들에게 내줄 자리에도 욕심을 냈다. 인사가 만사의 기본임을 무시하는 이런 행태에 대해서도 이시영은 제동을 걸었다. 위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시영 부통령은 이 대통령의 인사 기용이 유별나게 과거 그의 미주 시절 측근들에게만 편중하고 있다는 데 심한 불만을 품어왔으며 이 대통령의 지나친 독주에도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인사 기용에 노골적인 비판을 가해오던 이시영 부통령은 어느 날인가 이 대통령에게 '또 하와이에 누가 남아 있나'라는 핀잔 섞인 말을 한 것이 알려져 한때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했다."
1948년에 제정된 당시 헌법하에서 부통령은 헌법위원회 및 탄핵재판소의 장이자 대통령 유고 시의 권한대행이었다. 행정부의 인사정책은 부통령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시영은 대통령의 인사 독주를 비판하며 면전에서 핀잔을 줬다. 이럴 때만큼은 대통령을 6년 후배쯤으로 대한 것이다. 자신에게 권한이 있고 없음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바른말을 했던 것이다.
부통령의 지위는 황태자나 왕세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국정 운영에 타격을 주는 것은 부통령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시영은 개의치 않고 이승만 정권의 부조리를 크게 드러냈다.
이승만은 청년방위대라는 사실상의 사병부대를 결성했다. <역사학연구> 2021년 제82집에 실린 유상수 순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사적 통치 기반 형성과 변화'는 민병대 창설 목적과 관련해 "반대세력의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신의 대표적인 통치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설명한다.
청년방위대 편성은 1950년 3월 15일 완료됐다. 그런데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이 부대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결국 이 부대는 예비군인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다. 그런 뒤에 벌어진 것이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보급품 횡령으로 1951년 상반기에 병사 9만여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국민들이 희생된 사건이자 자신의 옛 사병부대원들이 희생된 사건인데도 이승만은 사건 해결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축소·은폐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의 한 수가 돌파구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해 5월 9일, 이시영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이 문제를 더욱 크게 부각시켰다.
이시영이 '큰 어른'인 이유

▲2010년 4월 17일 중구 남산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앞에서 열린 이시영 57주기 추모식에서 당시 남만우 광복회 부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목이 '국민에게 고함'인 이시영의 퇴임사는 그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지만 실은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국정운영에 참여하지 않는 부통령이 국정 난맥의 책임을 통감하며 퇴임 성명을 발표했으니 이승만에게 한 방을 먹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퇴임사에서 그는 사람은 사람답게 일을 해야 한다면서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공위(空位)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런 뒤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한다고 밝혔다.
실제 책임자인 이승만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통령이 나서 자신이 대통령을 잘못 보좌했다며 사퇴했다. 이시영은 이런 방식으로 이승만의 잘못을 드러냈다.
위의 '비화 제1공화국'은 "이 무렵 거센 세론(世論)을 막바지로 몰아붙인 것은 이시영 부통령의 돌연한 사임이었다"고 평한다. 그의 사임으로 인해 이승만은 마냥 외면만 하기가 힘들게 됐다. 신임 국방장관 이기붕에게 문제 해결을 맡기고, 5월 17일에 국민방위군 해체를 완료했다. 그런 뒤 국민방위군 간부들을 군법회의를 통해 처벌했다.
이듬해 5월,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비상계엄을 실시하고 불법 개헌을 추진했다. 이시영은 이 역시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8·5 대선에 출마해 이승만의 폭정을 비판했다. 1952년 7월 31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그가 "과거 4년간의 이 대통령의 정치에 대하여 심각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평했다. 부통령을 하면서 지켜봤던 이승만의 문제점을 들춰내며 정권을 흔들었던 것이다.
이시영은 대선 출마 성명을 통해 이승만의 폭정이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표면으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엄연한 우리 헌법을 관권으로 유린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전 국민은 관헌이 눈만 부르뜨면 무조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정치하에 모든 권리와 경제는 권력과 정실에 의해 농단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던졌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 책임제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 같은 인물의 출현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내각책임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일본은 동학혁명을 진압했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은 동학혁명을 반대한 조선 특권층이 볼 때는 썩 나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진보진영을 탄압했다. 그래서 우파 진영이 볼 때는 이승만의 집권이 환영할 만했다.
이시영은 특권층이자 우파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불의한 것은 무조건 비판했다. 일제도 비판하고 이승만도 비판했다. 세상이 잘못돼 가는데도 좌냐 우냐를 따지며 몸을 사리는 사람은 이 사회의 어른이 아니다. 이시영은 정치적 입장과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대들었다. 그런 점에서 큰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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