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군의 모습.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 것이 임오군란의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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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오군란을 지탱하는 힘은 청나라군이 상륙한 뒤인 그해 8월 하순에 붕괴됐다. 8월 26일(음력 7.13)에 대원군이 한양 남대문 밖인 용산의 청나라 군영에서 납치되고, 8월 29일과 30일에 각각 이태원과 왕십리에서 시민군이 청군에 패배했다. 임오군란으로 열리는 듯했던 새로운 세상은 한 달 남짓 만에 도로 닫혔다.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세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도성을 장악한 시민군이 자신들과 정치적 기반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 그 일파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장면이다. <매천야록>은 대원군이 고종으로부터 국정을 넘겨받은 뒤 "난병들에게 퇴각을 명하고 대사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대원군이 국정을 인수하는 것을 보고 시민군이 궁에서 퇴각했던 것이다.
이는 임오군란 주역들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과 연결된다. <매천야록>은 "난병들이 대궐에서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라며 이들이 적폐 세력을 찾아다니면서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적 청산에 힘을 쏟았다. 이는 인적 청산 못지않게 중요한 물적·제도적 청산을 대원군 정부에 맡김으로써 그것이 대원군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위 김정기 기고문은 "그들은 대원군의 현란한 술수에 집단최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라며 "드러난 환부에 일시적으로 속시원한 투약만 할 뿐, 그 병원균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대원군은 외면하고 있었다"고 평한다. 이런 한계는 다소 우발적이었던 임오군란의 특성에도 기인한다. 다소 우발적이라 파괴력을 발휘했지만, 이것이 사건의 확장성을 억제했던 것이다.
임오군란 주역들이 대원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것, 사회개혁의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한 것과 더불어, 또 하나 주목되는 장면은 고종의 직무정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일이다.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임오군란 직전까지 청나라는 형식상으로는 조선의 상국(上國)이었지만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는 간섭하지 못했다. 1845년·1866년·1873년·1876년에 나온 청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과 1879년에 나온 황제 광서제의 황명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것은 '조선은 청나라에 속해 있으나, 내치와 외교는 그 자주에 맡긴다',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문제에 개입할 명분과 실력이 없었던 청나라의 현실을 포장하는 입장 표명이었다.
그랬던 청나라가 1882년에 진압군을 보낸 것은 고종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직무가 정지된 고종은 청나라에 가 있던 김윤식·어윤중에게 '청국의 개입을 부탁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조선 조정의 정식 절차를 거친 게 아니므로 효력에 문제가 있는 지시였지만, 이를 영향력 팽창의 호기로 포착한 청나라는 그런 비공식 요청을 근거로 파병을 단행했다.
그렇게 불법 상륙한 청나라 군대는 대원군을 납치하고 시민군을 진압했다. 대원군 정부가 국정을 촘촘히 장악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시민군이 대원군을 믿고 적폐 청산에 주력한 결과였다.
임오군란은 조선의 권력 지형을 바꿔놨다. 이를 계기로 12년간 조선 국정을 주도한 것은 파병의 대가를 챙긴 청나라다.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1894년까지 조선은 전무후무한 내정간섭에 시달렸다. 청나라가 어부지리를 챙긴 셈이다. 조선 현지에서 이 내정간섭을 주도한 인물이 위안스카이(원세개)다.
임오군란 주역들은 약 한 달간 권력을 행사했다. 이 기세에 힘입어 개혁이 성사되는 듯하다가 청나라군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게 과거로 회귀했다. 임오군란은 성공한 듯하다가 실패한 무장 시민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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