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31 19:20최종 업데이트 25.05.3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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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에서 발발한 약 100개의 민란 중에서 왕권을 정지시키는 파괴력이 나타난 것은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전체적 에너지로 보면, 12년 뒤의 동학혁명이 훨씬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임금의 직무에 직접적 타격을 준 점에서는 임오군란이 단연 돋보였다.

부실한 급료 지급에 항의하는 직업군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촉발된 이 사건은 대중의 대규모 참여로 이어지면서 역대급 사건이 됐다. 대중이 대거 참여했으므로 군란이란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난(亂)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이는 정권의 입장을 반영하는 데다가 이 운동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임오군란을 대체할 더 나은 용어가 우리 사회의 공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 민중봉기에 참여한 대중은 봉건 관료들뿐 아니라 일본공사관을 상대로도 공격을 가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과 이에 따른 개항으로 조선 경제가 일본에 예속돼 가는 데 대한 불만이 그런 공격으로 표출됐다. 시장개방의 부작용으로부터 조선을 살리겠다는 정서가 반영된 사건이었다. 군인 급료 문제로 빚어진 일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확대된 것은 그런 정서를 가진 대중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은 1882년 7월 23일에 발생했다. 6월 9일에 일어났다고 적힌 책이나 논문도 많지만, 6월 9일은 음력 날짜다. 주상 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음력으로 고종 19년 6월 9일자 <승정원일기>는 이날 새벽 1시경부터 동틀 무렵까지 도성에 비가 내렸다고 한 뒤, 고종 임금이 시위 현장에 무위대장 이경하를 파견하는 장면, 지금의 서울 서대문역 2번 출구 부근에 있는 일본공사관이 주민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 등을 보여준다.

대중과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임오군란 시민군은 2016년과 2024년의 대한민국을 움직인 시민들보다도 훨씬 빨리 효과를 냈다. 이들은 지금의 종로3가역 인근인 운현궁으로 몰려가 사실상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주상권한대행'으로 추대하고 여세를 몰아 고종의 직무를 정지(흥선대원군의 섭정)시켰다. 1873년에 아들 고종에게 권좌를 빼앗겼던 이하응은 이로써 아들에게 '복수'를 하게 됐다.

권력 다시 잡은 대원군의 위세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찍은 흥선대원군.위키미디어 공용

구한말 역사를 정리한 황현의 <매천야록>은 "초10일 갑자일에 난병들이 궐을 침범하니 중전은 밖으로 달아나고 이최응·민겸호·김보현 등은 모두 살해됐으며 대원군 하응이 보정(輔政)했다"라고 알려준다. 왕을 보좌하는 형식으로 집정했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런 일이 불과 하루만인 7월 24일(음력 6.10)에 일어났으니, 임오군란의 효과가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다.

사건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을 고종 19년 6월 11일자(양력 1882.7.25) <고종실록>에서 만날 수 있다. 이날 의정부는 대원군을 예우하는 별단(別單)이라는 명칭의 매뉴얼을 작성했다. 별단에 따르면, 대원군 앞에서 대신들은 스스로를 시생(侍生)으로 불러야 했고, 정1품 관료들은 자신을 소인으로 불러야 했다.

2016년과 2024년의 대통령권한대행들은 기존 정부의 국무총리나 부총리였다. 임오군란 때의 '주상권한대행'은 시민혁명 주역들이 추대한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시민군의 지지와 고종의 승인에 힘입어 자기 정부를 구성했다.

임오군란의 그 같은 위력은 대원군이 친서민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대기업에 비견되는 시전 상인들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개혁도 일어났다. 역사서에 나오는 '상인'은 상인보다는 기업인에 가깝다. 이들은 조직을 거느린 경영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임오군란 때 있었다.

<역사비평> 2002년 가을호에 실린 김정기 당시 서원대 총장의 기고문 '임오년에 다시 보는 120년 전의 임오군란'은 "대원군은 기회 포착의 천재이자 그 뒤의 위기를 기막히게 관리하는 명수였다"라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집권 33일 동안에 그는 우선 시전 상인들의 도고행위 즉 상품의 매점행위를 즉각 중지시켰다. 이들은 국가에서 허락받은 몇몇 상품의 독점판매 외에 생활필수품인 쌀과 땔감까지 매점판매하여 서울 주민들을 아사 직전까지 몰고갔던 살인적인 물가고의 주범이었다."

자신을 권좌에 복귀시켜 준 대중에 대한 대원군의 답례는 잔혹한 면도 띠었다. 위 기고문은 "대원군은 칼을 빼 들었다"라며 "1000여 명의 시전 상인들을 살해해버린 것이다. 물가고는 일시에 해결되었다"라고 기술한다. 그 시전 상인들이 대원군이 아닌 다른 쪽에 정치자금을 댔기에 생긴 일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물가 상승의 또 다른 주범인 화폐 남발도 금지하고 서민생활을 짓누르는 각종 잡세의 징수도 금지했다. 오늘날과 달리 이 시기의 권한대행은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면서도 서민들의 경제적 복리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임오군란은 왜 실패했는가

별기군의 모습.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 것이 임오군란의 한 원인이었다.위키미디어 공용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오군란을 지탱하는 힘은 청나라군이 상륙한 뒤인 그해 8월 하순에 붕괴됐다. 8월 26일(음력 7.13)에 대원군이 한양 남대문 밖인 용산의 청나라 군영에서 납치되고, 8월 29일과 30일에 각각 이태원과 왕십리에서 시민군이 청군에 패배했다. 임오군란으로 열리는 듯했던 새로운 세상은 한 달 남짓 만에 도로 닫혔다.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세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도성을 장악한 시민군이 자신들과 정치적 기반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 그 일파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장면이다. <매천야록>은 대원군이 고종으로부터 국정을 넘겨받은 뒤 "난병들에게 퇴각을 명하고 대사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대원군이 국정을 인수하는 것을 보고 시민군이 궁에서 퇴각했던 것이다.

이는 임오군란 주역들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과 연결된다. <매천야록>은 "난병들이 대궐에서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라며 이들이 적폐 세력을 찾아다니면서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적 청산에 힘을 쏟았다. 이는 인적 청산 못지않게 중요한 물적·제도적 청산을 대원군 정부에 맡김으로써 그것이 대원군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위 김정기 기고문은 "그들은 대원군의 현란한 술수에 집단최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라며 "드러난 환부에 일시적으로 속시원한 투약만 할 뿐, 그 병원균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대원군은 외면하고 있었다"고 평한다. 이런 한계는 다소 우발적이었던 임오군란의 특성에도 기인한다. 다소 우발적이라 파괴력을 발휘했지만, 이것이 사건의 확장성을 억제했던 것이다.

임오군란 주역들이 대원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것, 사회개혁의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한 것과 더불어, 또 하나 주목되는 장면은 고종의 직무정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일이다.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임오군란 직전까지 청나라는 형식상으로는 조선의 상국(上國)이었지만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는 간섭하지 못했다. 1845년·1866년·1873년·1876년에 나온 청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과 1879년에 나온 황제 광서제의 황명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것은 '조선은 청나라에 속해 있으나, 내치와 외교는 그 자주에 맡긴다',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문제에 개입할 명분과 실력이 없었던 청나라의 현실을 포장하는 입장 표명이었다.

그랬던 청나라가 1882년에 진압군을 보낸 것은 고종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직무가 정지된 고종은 청나라에 가 있던 김윤식·어윤중에게 '청국의 개입을 부탁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조선 조정의 정식 절차를 거친 게 아니므로 효력에 문제가 있는 지시였지만, 이를 영향력 팽창의 호기로 포착한 청나라는 그런 비공식 요청을 근거로 파병을 단행했다.

그렇게 불법 상륙한 청나라 군대는 대원군을 납치하고 시민군을 진압했다. 대원군 정부가 국정을 촘촘히 장악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시민군이 대원군을 믿고 적폐 청산에 주력한 결과였다.

임오군란은 조선의 권력 지형을 바꿔놨다. 이를 계기로 12년간 조선 국정을 주도한 것은 파병의 대가를 챙긴 청나라다.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1894년까지 조선은 전무후무한 내정간섭에 시달렸다. 청나라가 어부지리를 챙긴 셈이다. 조선 현지에서 이 내정간섭을 주도한 인물이 위안스카이(원세개)다.

임오군란 주역들은 약 한 달간 권력을 행사했다. 이 기세에 힘입어 개혁이 성사되는 듯하다가 청나라군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게 과거로 회귀했다. 임오군란은 성공한 듯하다가 실패한 무장 시민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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