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30 07:05최종 업데이트 25.05.30 07:05
  • 본문듣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잘게 다진 고기가 들어간 유니짜장 스타일의 동성각의 짜장면 곱빼기. 유리컵에 담긴 건 보리차다.여운규

아주 오래전,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이순재 배우는 대발이 아버지 역으로 인기를 끌었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이며 툭하면 버럭버럭 질러대는 호통이 체질화된 대발이 아버지였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성실하고 한눈팔지 않으며 검약을 실천하는, 한 마디로 그 시대 엄격한 가부장의 전형인 캐릭터였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퇴근한 대발이 아버지에게 대발이 어머니(김혜자 분)가 묻는다. "오늘은 점심 뭐 드셨수?" 대발이 아버지의 대답은 "짜장면"이었다. 특유의 무심한 듯 퉁명스러운 말투. 그러자 이내 타박이 돌아온다. "아니, 당신은 왜 허구한 날 짜장면이유. 딴 거 좀 사 드슈." 대답은 딱 한 마디. "나는 짜장면이 좋아." 이러고는 그만 입을 닫는다.

간단하고 저렴한 음식으로 매일 점심을 때우는 남편이 안쓰러워 좀 더 제대로 된 식사를 권하는 아내의 마음이었겠지.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있던, 아직 어렸던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세상 맛있는 짜장면이 어디가 어때서 저러실까. 짜장면 그거, 나는 없어서 못 먹는구만. 대발이 아버지도 좋아하신다는데 뭐가 문제? 나는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도 있었다. 어른이 되면 맨날 맨날 짜장면을 사 먹을 수 있는 거구나. 어른이란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내게 어른이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짜장면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훗날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삼겹살 정도는 언제든지 사줄 테니 자주 놀러 오라"던 취업한 선배의 호언장담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래도 삼겹살이 짜장면보다는 더 어른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아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고, 밥벌이를 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매일 점심을 사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원한다면 매일 짜장면을 먹을 수 있게 된 거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했던 것처럼 마구 신나는 일은 아니었다. 대발이 어머니의 타박도, 애써 그걸 외면하고 딴청을 부리던 남편의 마음도, 너무 잘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는 게 이런 거였다고?

동성각 짜장면의 하얀 면발

서울 광화문 외진 골목에 위치한 동성각은 1967년에 개업한 노포다여운규

며칠 전, 짜장면을 다룬 다큐멘터리 방송을 본 이후로 짜장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동안 짜장면을 먹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바심마저 났으니 말 다한 거다. 라면도 마찬가지지만, 짜장면은 참 이상한 음식이다. 안 먹고 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꼭 먹어줘야 할 것만 같고, 특히 다른 사람이 먹는 걸 보면 나도 안 먹고는 못 배긴다. 이른바 '인이 박인다'는 게 그런 건가 싶다. 때마침 혼밥 기회가 생긴 어느 점심시간에 홀리듯 짜장면을 찾아 중국집으로 향했다.

사무실 근처에 유명한 중화요리집도 있지만, 다른 거 말고 짜장면 한 그릇 간단히 먹자 할 때 젤 먼저 떠오르는 곳은 바로 여기, 서울 광화문 외진 골목길에 위치한 노포 '동성각'이다. 1967년 개업이라니, 사람으로 치면 환갑이 머지않은 나이다. 여기 짜장면 맛있다. 그렇지만 다른 가게에 비해 매우 특출나게 뛰어나거나 한 맛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 짜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중국집 면에는 밀가루와 함께 소다, 즉 탄산수소나트륨이 들어가는데 이걸 적당히 사용하면 면에 탄력이 생겨 쫄깃해지고 무엇보다 잘 불지 않게 된다. 다만 배달을 많이 하게 되면서 면에 점점 더 소다를 많이 쓰게 되었고, 결국 이게 소화를 방해한단다. 알칼리성인 소다가 위산을 중화하는 거다. 그래서 짜장면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많다. 물론 기름진 짜장 소스도 소화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소다를 많이 넣으면 면이 노란색이 된다. 시판되는 면 강화제에 치자 색소가 들어간다는 말도 있다. 노란 면이 쫄깃하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이를 강조하는 의미일까. 문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소화력은 반감된다는 거다. 그래서 요즘 중국집 면이 너무 노란색이면 살짝 무섭다.

그런데 동성각의 면은 비교적 하얀 편이다. 직접 수타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다른 집과는 면 색깔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이 집 짜장면은 소화가 잘된다. 점심때 곱빼기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도 오후 세 시 정도면 어느새 조금 출출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다른 집 짜장면과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진다.

자리에 앉으면 투명한 유리잔에 보리차를 따라준다. 나는 이게 또 노포 특유의 품위 내지는 감성처럼 느껴져서 괜히 좋다. 보리차를 마시고 식초 뿌린 단무지를 맛보며 짜장면이 나오길 기다린다. 곧바로 등장한 곱빼기 한 그릇. 검은색 짜장과 하얀 면이 선사하는 대비를 잠시 구경하다가 잘 섞어 비빈다. 고운 고춧가루도 빠질 수 없는 조연이다.

면은 탄력이 적당하면서 부드럽다. 잘게 다진 고기와 양파를 넣어 만든 유니짜장 스타일의 소스는 약간 슴슴한 듯, 많이 달거나 짜지 않아 편안한 맛이다. 남김없이 잘 먹었다. 혈중 짜장 농도랄까, 그런 게 잘 채워진 풍족한 느낌이다. 아직은 그래도 곱빼기 한 그릇 정도는 먹어낼 수 있을 만큼은 건강하고, 짜장면 정도야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재력도 있다. 그렇네. 나는 어른이구나. 어른이라 다행이다. 비로소.

짜장면, 오래 남아주기를

짜장이 묻지 않은 쪽의 면은 거의 흰 빛을 띠고 있다.여운규

참 오랜만에 먹은 짜장면이었다. 하긴 요즘 들어 짜장면 먹을 일이 많이 없긴 했다. 얼마 전까진 대발이 아버지만은 못해도 꽤 자주 먹던 짜장면이었는데 왜 이렇게 뜸해진 걸까?

제일 먼저 짚이는 건 아무래도 가격 상승 문제였다. 모든 게 너무 많이 올랐다. 특히 음식값은 정말이지 너무 짧은 기간 동안 너무 가파르게 올라버린 것 같다. 7000~8000원이면 족하던 백반 한 그릇 값은 한 2년 남짓 사이에 1만 원을 뚫어버렸다. 이제 좀 그럴듯한 곳에서 점심 한 끼 먹자면 최소 1만 5000원은 생각해야 한다.

짜장면이라고 별다른 수가 없다. 이 동네 기준 보통 한 그릇에 8000원. 곱빼기는 1만 원이다. 옛날에는 정부가 짜장면 가격을 통제했다.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라 값을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식의 인위적인 통제가 가능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짜장면은 그래도 여전히 저렴한 편이지만, 옛날처럼 다른 외식 메뉴보다 한결 싸거나 하지는 않다. 대발이 아버지가 지금 계셨다면 다른 음식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국요리의 세대교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파는 '중국집'이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에 마라탕과 양꼬치, 꿔바로우를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물론 마라탕도 맛있고 양꼬치도 너무 좋지만, 그래도 짜장면이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서운하다. 사무실 근처에서 나름 오랜 업력을 자랑하고 규모도 있던 중국집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면서 쓴 입맛을 다셨다. 크게 유명하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제법 먹을 만했고, 근처 직장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던 집들이었다.

우리 세대가 그렇게 짜장면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특별한 외식의 대표 메뉴였고, 누구 하나 짜장면에 얽힌 추억이 없는 이가 없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얼얼한 마라탕 맛에 익숙해져서 상대적으로 짜장면 짬뽕의 인기는 좀 덜한 것 같다. 배달 음식 순위를 살펴보니 10대들은 마라탕을 가장 많이 주문했다는 뉴스가 눈길을 끈다. 50대들의 1위는 짜장면이었고.

어떤 이는 말하길,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짜장면 파는 중국집은 거의 다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 싶다가도 시험 끝났다고 친구들과 마라탕집으로 몰려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이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짜장면이여, 부디 오래 남아 주기를. 언제나처럼 불쑥 생각날 때 가까운 곳에 있어 주기만 바랄 뿐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